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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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당시 촬영된 유명한 사진들 중 하나. 이 사진은 MBC 선택 2012에서 방영된 영상에도 등장한다. 뒤에있는 땅크는 M26퍼싱이 아니라 M46 패튼이다.

1950.06.25 - 1953.07.27 (휴전)

한국전쟁은 발발일을 기준으로 6. 25 전쟁이라고도 불리며, 이외에 조선전쟁 등으로도 불린다.

6.25 전쟁이라는데 몇일날 일어난지도 모르는 병신이 있다. 으이구!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1차 전쟁[편집]

전개과정[편집]

권모술수[편집]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한 이유가 있었다. 남한을 따먹으면 거기서 지가 수령이 되려고 한 거고 실패하면 박헌영같은 정적(政敵)들한테 "이 십쇼캬. 너땜에 졌잖아!"라며 그걸 핑계로 숙청시키기 위해서였다. 김일성은 참 더럽게 싸가지없는 새끼다. 지가 독재를 쳐 부리고 싶어서 죄없는 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쳐박은게 바로 김일성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새끼다. 한국전쟁은 공산주의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고 그냥 김일성 한놈새끼만 뒤룩뒤룩 살찌게 만들려고 일으킨 전쟁일 뿐이다. 한국전쟁이 공산주의 VS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는 어린이들은 순진한 어린이들이고 실상은 김일성이 권모술수를 부려서 자기 개인왕국을 쳐만들려고 일으킨 전쟁일 뿐이다. 그래서 김일성이 강계까지 도망치자 소련이 개입하는 시늉만 하고 개입하지 않은 것이다.

폭풍전야[편집]

항간의 몇몇 친북적 인사들은 김일성은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스탈린이 뒤에서 등떠밀어서 전쟁이 벌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문서들로 밝혀진 바로는, 하지 말라는 스탈린에게 김일성이 떼를 써서 겨우 허락을 받아낸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김일성은 그렇게 소련으로부터 2차대전에서 구르고 다 녹아내리는 파파샤[1], T-34/85를 비롯한 무기들을 지원받아서 전쟁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의 바지수령인 김두봉은 이 전쟁을 반대하는 바람에 수령에서 짤렸고 그 자리에는 김일성의 말을 잘듣는 쵀용건을 앉혔다. 김일성이 작전사령관이 되고 박헌영이 좌참모, 김책이 우참모가 되어 전쟁준비를 했다. 이들은 전쟁 프로젝트를 짜면서 최전방에 3개의 기계화보병사단을 배치하고 그 뒤로 부대들을 쭉 배치해서 소련으로부터 뗑강 부려서 빼앗아 온 지원받은 T-34/85전차를 맨 앞에 내세우고 돌격하기로 했다.

당시 남북한은 38선을 경계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남한 입장에서 방어하기 썩 좋지 않았다. 게다가 신성모라는 병신이 남한의 국방부장관이었는데 이 병신은 군복무를 한 적이 없는 위인임에도 불구하고 선장 한번 했다고 국방장관을 시켜준 것이었다. 게다가 군인 출신이기는 했지만 보직이 병참과장[2]이라서 병력을 지휘해본 적이 없는 채병덕을 육참총장에 앉히기까지 했다. 채병덕은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백두산에서 먹겠다"는 말을 하는 바람에 미군들이 주요장비들을 철수시켰다.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머전에서, 저녁은 부산에서 먹게 되었다. 근데 같은 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으니 말에 대해서 나름대로 책임을 진건가?거기에 당시의 한국군은 주5일 근무제를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금요일 오후에는 전 병력들이 휴가를 떠났다. 김일성은 이걸 노리고 1950년 6월 마지막 주 일요일을 침공일로 정했다.

한편 박정희는 이 때 자기네 형 박상희가 좌빨짓을 하다가 잡히는 바람에 같이 연루되어 대위로 복무하고 있다가 짤려서 계급 없이 사병 비슷한 신분으로 백의종군하고 있었는데 김종필을 이 때 알게 되었다. 명목상의 계급은 중위인 김종필이 위였으나 실제로는 대위 유경험자인 박정희가 상급자 노릇을 했다. 1950년 6월 23일 박정희와 김종필은 38선 근처에서 정체불명의 차량들이 대량으로 이동하고 있는 장면을 포착했는데 이걸 신성모에게 보고했으나 신성모는 육본에 있는 장교클럽에서 놀고먹느라 여념이 없어서 이 보고를 씹었다.

기습 남침[편집]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남침하여 전쟁이 발발하였다.[3] 공교롭게도 이 시각은 1950년 브라질 월드컵 개막전 휘슬이 울린 그 시각이었다. 지구 정반대 방향에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이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을 탈탈 털어버리는 동안[4] 북괴는 남침을 시작한 것이다.

이때 휴가나간 장병들이 일제히 복귀했고 모여서 적의 남하를 막을 준비를 했다. 이러면서 정부에서는 확성기로 "서울은 안전합Nida"를 외쳐댔다.

항전[편집]

한국 공군은 전쟁 전 힘들게 산 몇대 안되는 L-4 연락기와 L-5 연락기, AT-6 훈련기를 타고 직접 손으로 폭탄을 던져가면서 적의 남하를 필사적으로 막아내려 했다. 또한 국군은 당시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던 기갑장비인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로 대전차 임무를 수행했다. 심지어 폭탄을 들고 직접 적 전차를 터트리는 경우도 있었으며 105mm 곡사포로 직접 T-34 전차를 공격하다 전사한 사례도 있다.

열세[편집]

당시 국군에는 전투기와 전차가 한대도 없었다. 그러나 북한은 다량의 소련제 전투기와 소련제 T-34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고, 국군이 보유한 57mm 대전차포와 2.36인치 바주카 같은 대전차 화기는 적 전차에 피해를 주지 못했다.

국군은 현역 군인들을 쥐어짜도 안되겠으니까 아직 임관도 안한 육군사관학교 2기 생도들까지 불러들여서 소총수로 전장에 투입했다. 하지만 육사 2기 생도들은 포천을 막다가 대부분 전사하고 살아남은 몇 안되는 인원들이 바로 소위로 임관해서 전장에 배치되었다.

서울 함락[편집]

선장 한번 했다고 그 경력으로 국방장관이 된 신성모는 지들끼리만 도망치려고 1950년 6월 28일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시켜서 한강 철교와 한강 대교를 폭파했다. 하지만 국군의 병력과 장비는 대다수가 한강 이북에 있었다.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으나 국군이 춘천-홍천 전투에서 승리해 3일간 한강 도하가 지연되었으며, 이것은 북한군에게 있어 큰 악영향이 되었다. 3일간 한강 이북에 남겨진 국군 장병들은 자력으로 한강을 도하해 한강 이남에서 재 편성되었으며, 덕분에 국군의 전투력을 최대한 보존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신성모는 나중에 이 한강폭파에 대한 책임을 최창식 대령에게 죄다 뒤집어씌우고 1950년 9월 21일 최창식을 총살시킨 뒤 입을 닦았다.

춘천-홍천 전투의 승리[편집]

1950년 6월 25일부터 1950년 6월 30일까지 제6보병사단은 춘천 지역에서 북한군을 성공적으로 차단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 덕분에 북한군은 3일동안 한강 도하가 지연되었으며 이때 번 시간 덕분에 UN군이 파병을 할수 있게 했다

미군의 참전[편집]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시키고 대전까지 밀고 내려오자 이에 미국은 한국을 구해야 한다면서 한반도에 병력 파병을 승인했다. 하지만 미국은 사람들이 죄다 왕자병 환자들인지라 꼴랑 찰스 스미스 대대 하나만 보내서 막으려고 했다. 찰스 스미스 대대는 1950년 7월 1일에 항공편으로 부산에 도착했고 7월 4일에 대전에 도착했다. 찰스 스미스 대대원들은 자뻑이 지나쳐서 전투를 하러 간다는 사람들이 축음기를 켜놓고 대전으로 향하는 차량 안에 누워서 햄버거를 까먹으면서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찰스 스미스 부대가 1950년 7월 4일 대전에 도착하자 북한군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우린 세계최강 미군이셔. 우리가 왔으니까 얼른 전쟁 그만두고 너네땅으로 되돌아 가셔. 안그러면 큰일날 것이셔."[5]

하지만 1950년 7월 5일 북한군은 그냥 밀고 들어와서 찰스 스미스 대대를 밟아죽였다. 찍!

이에 빡친 미국 수뇌부에서는 24사단을 파병했지만 북한군은 역시 이 24사단도 밟아죽였다. 찍!

이 과정에서 24사단 직할 포병대대장인 밀러 O. 페리 중령이 전사했는데 이는 한국전쟁이 개전된 이래 대대장급 이상의 고급지휘관이 전사한 최초의 사례였다. 게다가 24사단장 윌리엄 F. 딘 소장을 포로로 잡았다. 근데 북한군의 군인들은 워낙 까막눈이라 미군 계급장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서 딘을 포박해놓고도 딘이 장군인줄도 몰랐다고 한다. 엄청난 대박을 터뜨렸는데도 정작 자기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전투에서 적의 장성을 포로로 붙잡은 거면 전쟁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대박을 친거다. 한동안 딘이 장군인줄도 모르고 붙잡고 있다가 나중에 북한군 장성들과의 대질끝에 딘이 장군이라는 사실을 겨우 알아냈다.

결국 대전이 함락되고 이젠 대구까지 밀려나버렸다. 한국군과 미군은 정말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낙동강 방어선[편집]

이에 미국과 UN은 모여서 회의를 했다. 한반도는 이미 글렀으니까 다른데 알아보자고 했다. 어떤 사람은 한국의 피난민들을 미국령 사모아로 이주시키자고 했고 어떤 사람은 한국의 피난민들을 일본으로 이주시키자고 했는데 일본으로 이주시키자는 사람이 일본 정부한테 가서 "야, 이놈아. 여기 대한민국 정부 차리게 땅 하나만 꿔줘라."라고 요청했고 이에 일본 정부는 초등학교 건물 하나를 완전히 비운 뒤 거기다 대한민국 정부건물로 삼을 준비를 완료했다.

하지만 해리스 월튼 워커 중장이 나서서 상을 뒤엎었다. 워커 중장은 "한반도 포기라니? 뭔 개소리여! 한국은 무조건 지킨다. 형아가 지킨다. 이 형아가 지키면 무조건 지킨다. 잔말 말고 형아가 시키는 대로 한국을 막아라. 포기는 없다!"라고 외치면서 미국과 UN에게 한반도를 포기하지 못하게 했다. 게다가 자신이 직접 전장을 돌아다니며 전투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외아들 샘 심즈 워커 대위[6]를 전선 최전방의 중대장으로 배치하면서까지 이를 악물고 낙동강을 방어했다. 이게 중요한 이유는 월튼이 샘을 낳은 나이가 36살이라는 점이다. 무지하게 힘겹게 얻은 외아들인데도 그런 외아들마저 한국을 지키려고 전장에 끌어들인게 월튼 워커다. 워커 중장은 자신의 대가 끊어질 걸 각오하고 한국을 방어해준 거다. 하지만 힘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이에 터키에서 타흐신 야즈즈 준장이 이끄는 터키군 2개 사단이 이스탄불발 부산행 군용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워커는 야즈즈가 도착할 때까지 버티면 되는 거였는데 힘겨웠지만 잘 버텨냈고 때마침 도착한 야즈즈 부대가 합류하면서 낙동강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그리고 이 여세를 몰아서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가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게 되었다. 낙동강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상으로 UN측에서는 타흐신 야즈즈를 준장에서 소장으로 특진시켜줬다.

인천상륙작전[편집]

이무렵 맥아더는 적 후방에 대한 상륙작전으로 머구 코앞까지 밀린 불리한 전황을 한번에 뒤집길 원하던 차였는데 이를 만족시키는 곳은 바로 인천항 이었다. 상륙하기 좆같은 특징을 모두 보유한 인천의 특성 때문에 맥아더 휘하 참모들은 군산이나 아산만으로 장소를 변경하도록 권했지만 이들 또한 상륙조건이 개판인데다 인천에 비해 전략적 가치 역시 매우 낮은 곳들이라 맥아더는 이 의견들을 쿨하게 씹고 직접 합참과 해군을 설득하여 UN군 병력 7만5천명을 쑤셔처박아 인민군의 청년막을 냅다 찢어버렸다. 그제서야 후장이 근질근질함을 깨달았던 김돼지 MK.1은 서울로의 진격을 막기위해 경인가도에 어마어마한 숫자의 지뢰를 부설하고 서울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동원했지만 그나마도 정신을 못차렸던건지 곧 프레스기로 압축당해 찌부러질 낙동강 전선의 부대들은 뺄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후장부터 입까지 스트레이트로 뚫리면서 응디속에 계속 꿍쳐왔던 똥오줌이 질질 새어나와 부랄만 챙겨들고 각지에 숨어들어 빨치산이 되었다 카더라

그리고 드디어 1950년 9월 28일, 대한민국은 서울을 수복했다.

북진[편집]

이 여세를 몰아 UN군은 멸공통일을 이루기 위해 북쪽으로 진격했다. 이에 김일성은 평양에서 농성을 했고 평양에서 공성전이 벌어졌는데 이 공성전에서 수성측이 영혼까지 탈탈 털렸다. 결국 김일성은 물에 빠진 생쥐꼴로 강계까지 야반도주했다. 한편 원산에서는 미군 해군과 공군이 주구장창 폭격을 해대고 있었다. 탄약이 남아도는지 팔리지 않는 재고 탄약을 죄다 원산에 투척해버렸다. 이에 해방직후까지만 해도 평양에 이어 북한 제 2의 도시였던 원산은 그야말로 석기시대로 되돌아갔다. 원산 전지역을 통털어 불바다가 아닌 곳이 없었고 원산에 들어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미군은 이런 식으로 주구장창 원산에 탄약을 꼴아박았다. 아무것도 안남든 말든 그딴건 모르겠고 그저 주구장창 퍼붓기만 했다.

중공군 개입[편집]

전쟁 초반에 중국의 주은래 총리는 미군의 개입을 예상하고 김일성에게 경고했지만 땅따먹기에 취한 김일성은 그냥 씹었다. 주은래는 유사시를 대비해 국경에 중공군을 배치시키고 한반도 정찰을 명령했다. 국군과 UN군이 서울을 탈환하고 38선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하자 주석 모택동과 총사령관 팽덕회가 좀이 쑤셔서 항미원조라 하여 참전을 희망했다. 외교부장이었던 주 총리는 출병해서 딱히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위에서 까라니 까는 수밖에. 미국에 '남조선군이 홀로 북진하면 막지 않겠으나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면 중국에 대한 도발로 간주할 테니 알아서 하라'고 몇 번 경고하다 역시 이승만이 한 고집 하는 인간이라 씹히니 결국 참전했다.

이때 중공 정부에서는 중공군에서도 명장으로 유명한 송시륜[7]을 중공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북한을 도와주기 위해 강계로 파병했다. 김일성은 또 야반도주할 궁리를 쳐하고 자빠졌는데 때마침 송시륜이 도착하자 송시륜의 등 뒤에 숨어서 전쟁에는 관여조차 못하고 눈물까지 쳐 흘려가면서 벌벌 떨기만 했다. 이에 송시륜은 김일성을 잘 달래서 절대로 안죽게 보호해주겠다고 한 뒤 미군과 싸우러 가기 위해 남진했다.

장진호 전투[편집]

송시륜이 이끄는 중공군은 남진해서 1950년 11월 27일에 장진호에서 올리버 스미스 소장이 이끄는 미군 해병대를 만났다.

올리버 스미스 소장은 직속상관인 에드워드 알몬드 중장의 명령을 씹고 일부러 느리게 진군했는데 유담리에서 진을 치게 되었다. 이 때 중공군이 미 해병대를 포위하기 위해 하갈우리 쪽으로 가고 있었고 미 해병대는 3대대장 리지 중령이 하갈우리를 방어하게 되었고 리지 중령과 중공군은 하갈우리 쟁탈전을 벌이느라 그야말로 혈투를 벌였다. 리지 중령이 하갈우리를 지켜내는 데에 성공한 덕분에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다.만약 알몬드 중장이 시키는대로 쾌속진격을 했더라면 퇴로가 완전히 끊겼을 수도 있었다.

여기서 치열하게 교전을 벌이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총질하고 치고박고 싸웠다. 1월의 장진호는 영하 31도의 초강력 추위에 시달리는 동네였는데 총이 얼어서 사격이 제대로 되지 않자 양쪽에서는 맨주먹 또는 대검을 들고 서로 섞여서 현피를 뜨기도 했다. 미군이나 중공군이나 양쪽에서 심하게 얻어터지는 인원들이 대량으로 발생했다.

이놈의 미친년 널뛰는듯한 추위는 미군이나 중공군이나 양쪽 모두에게 공평하게 강적으로 나타났고 실제로도 전사자 못지 않게 얼어죽은 병력이 나왔을 정도였다. 동장군은 미군이고 중공군이고 가릴것 없이 닥치는 대로 공격했다.

어찌나 추웠는지 총과 야포를 비롯한 각종 화기들은 얼어붙는 것을 막기 위해 2시간마다 한번씩 허공에 총질해야 했으며 차량들도 얼어붙는 것을 막기 위해 24시간 시동을 켜놓아야만 했다. 또한 타이어가 얼어붙지 않게 하기 위해 모든 차량들은 쓸데없이 앞뒤로 왔다갔다해야만 했다. 이러한 강추위 속에 미 해병대는 돌격같은 후퇴를 감행했고 미 해병대가 몸빵이 되어 나머지 부대들과 피난민들은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미 해병대의 몸빵으로 흥남철수라는 역사상 유례없는 대피난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미 해병대는 정말 움찔할만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탄약을 실은 차량이 공격받아서 차량째로 폭파한 것이었다. 하지만 올리버 스미스 장군은 지극히 침착했고 이 난관을 슬기롭게 극복했다.

같은 시각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원자폭탄을 사용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었다.

송시륜 휘하에는 정보작전통역장교로 모안영이 복무중이었는데 그가 다름아닌 모택동의 아들이다. 중공군 수뇌부는 그래도 모택동의 아들이니까 전사하면 절대로 안된다고 생각해서 야전이 아니라 사령부에 넣어야지 싶었다. 그래서 소대장이 아니라 저 보직을 받은 것인데 문제는 중공군이나 미 해병대나 둘 다 사령부가 직접 공격을 당할 정도로 치열하게 전투를 했다는 점이다. 결국 모안영은 이 상황에서 미 공군의 폭격을 받아 전사했는데 모택동은 중국과 북한의 우호를 상징하기 위해서 모안영의 시체를 되돌려받지 않고 그대로 북한에 매장하도록 조치했다.

흥남철수[편집]

북한이 좆같다는 것을 깨달은 북한 주민들은 UN군이 철수한다는 소식을 듣자 거기에 꼽사리껴서 철수했다. 이 와중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이렇게 군인과 민간인들이 막섞인 피난 행렬은 흥남에 도착했다.

이때 미국에서는 철수할 병력들을 수송할 선박들을 징발해 놓은 상태였는데 예상치 못한 피난민들이 대량으로 따라붙는 바람에 미군은 참으로 난감해졌다. 고심끝에 미군은 사람부터 살리자고 결정했으며 결국 자기들이 타고 온 차량과 사용하던 야포 등을 흥남 앞바다에 모아놓은 뒤 군함, 민간 선박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을 죄다 태웠다. 특히 메러디스 빅토리호에는 등유와 화약등을 가득 실은 배였는데 이 배가 피난민들을 전담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정원의 3배가 넘는 인원을 싣고 흥남항을 떠나 목포항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배에 모두 탑승하자 미 해군은 흥남항에 모아놓은 장비들에다 함포사격을 가해서 완전히 없애버렸다.[8]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목포에 도착했으나 정박할 수 없어서 다시 부산항으로 가서 거기서 피난민들을 내렸다. 이날이 1950년 12월 25일이었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는 3명이 태어났다.

1.4 후퇴[편집]

흥남철수 이후 중국군 장병들이 파도타듯이 쭉쭉내려오자 국군은 또 다시 서울을 포기하고 후퇴하였다. 중국군들에 인해전술을 맛본 국군과 UN군은 1.4후퇴 직후 중국에 정전협정을 제시하였으나 중국중화민국을 빼고 베이징정부만을 중국으로 인정하라는 그때 당시로는 말도안되는 미국에 굴욕을 주는 조건을 내걸어 미국중국을 침략자로 선언하고 항전한다.

계속적인 추가바람.

후일담[편집]

휴전이 성립되면서 포로교환이 이루어졌다. 한국전쟁이 시작하자마자 포로로 붙잡힌 윌리엄 F. 딘 소장은 인민군 사단 참모장인 리학구 총좌[9]와 맞교환되었다. 윌리엄 F. 딘 소장은 고국으로 돌아와서 중장 진급과 동시에 전역 처리되었지만 북한으로 끌려간 리학구는 10년동안 비참하게 살다가 1963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북한쪽은 김일성은 대외적으로는 휴전협정일이 자기네들이 이긴 전승절이라고 떠벌이고 다녔지만 속으로는 자기네들이 패했다면서 그 책임을 박헌영에게 뒤집어씌워 1955년에 박헌영을 총살했다. 그리고 그 최용건을 1972년까지 바지수령으로 두고 김일성은 내각총리로 있다가 1972년에 김일성이 수령에 등극하게 된다.

남한쪽은 이승만 독재정권이 1961년까지 이어지다가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일으켜 대통령이 되고 이승만의 떨거지들을 모조리 사형에 처했다.

1977년까지는 북한이 더 선진국이었으나 1977년에 전세가 역전되어 대한민국이 더 선진국이 되더니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비교자체가 안될 정도로 격차가 벌어졌다. 2000년대 이후에는 경제로 따지면 대한민국은 스페인과, 북한은 짐바브웨와 각각 동급이 되었다. 축구실력이 대한민국은 스페인과, 북한은 짐바브웨와 각각 동급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스페인 2010년 FIFA 월드컵 우승했다.

영향[편집]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한국인의 의식구조가 본격적으로 배배 꼬이기 시작한 계기. 당연하겠지만 남북한 서로 개박살났다. 남한은 공산주의자 및 빨갱이 북한 애들이라는 적을 경험하여 빨갱이로 몰아가는 좋은 구실거리가 하나 생겼고 북한은 김일성이 자신 주변에 있던 놈들을 숙청하고 김씨왕조를 지금까지 이어지게 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한반도에서 계급제도의 잔재가 아직까지 남아있었다. 물론 계급제도를 철폐했다고 하지만 차별이 아직까지 있었는데 이 전쟁을 계기로 다 개박살났으니 양반이니 뭐니 먹고 살기 바빴으므로 이러한 편견은 없어졌다.[10]


  1. ППШ-41, PPSh-41. 일명 따발총. 좋은 상태로 투입된 건 아니었으나 어쨌든 국군에게는 강렬한 인상을 주어서 북괴의 트레이드마크 비슷하게 되었다.
  2. 당시 일본군에게는 해당병과 훈련만 시켰다. 따라서 병력을 통솔할 기회는 보병, 포병, 기갑 이렇게 3개 병과에게만 있었다. 병참인 채병덕은 말 그대로 무늬만 군인이지 실제로는 회사원이었다.
  3. 요즘 청소년들은 한자를 잘 모르고 영어만 하다 보니 남침이라고 하면 남한이 선빵쳤다는 줄 알아먹는다. 그래서 설문조사에서 '요즘 애들은 한국전쟁이 북침으로 시작된 줄로 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애초에 한국전쟁은 남한의 침공인가? 북한의 침공인가? 식으로 좀 더 알아먹을 수 있게 했으면 될 텐데 굳이 저렇게 한 건 안보교육에 예산 좀 쏟아부을 명분 얻어서 그 예산 중간에 해처먹으려는 꼰대들의 의도라고 밖에는... .
  4. 경기 결과 : 브라질 4-0 멕시코
  5. 말투가 날아라 슈퍼보드의 저팔계의 말투와 똑같다.
  6.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1950년 12월 24일날 자신이 은성무공훈장을 받게 될 때 아버지가 찾아오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맥아더 원수한테 개기면서까지 참전을 고집했다. 그리고 샘 워커 역시 한국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대한민국과 함께했으며 이후 군인으로 승승장구하고 베트남 전쟁에서도 용맹을 떨쳤다. 훗날 아버지 월튼과 같이 나란히 대장에 진급했다.
  7. 당시 중공군은 공산주의는 평등해야 한다는 이념 때문에 계급이 없고 직책으로 지휘하는 시스템이었지만 송시륜은 대장(4성장군) 대우를 받았다.
  8. 저 장비들을 실을 공간에 사람들을 싣느라 장비를 싣지 못하게 된 것인데 야포나 총기류는 둘째치고 차량만 꽤 되었기 때문에 저거 다합치면 집이 몇십채 값이라서 돈은 좀 아깝지만 중공군한테 노획당하지 않으려면 이렇게 함포사격으로 다 폐기처분해야만 했다.
  9. UN군에서 잡아놓은 북한군 포로 중에 계급이 제일 높았다.
  10. 일본에서는 비슷한 차별적인 예로 "부락쿠민"이라는게 있는데 아직까지 차별되어서 문제로 남는다고 한다.

2차 전쟁[편집]

  • 1967년 56함 피격침몰사건
  • 1968년 1월 21일 사태
  • 1968년 10월 30일~11월 2일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
  • 1970년 대한민국 해군 방송선 피랍 사건
  • 1974년 대한민국 해경 경비정 제863호 침몰 사건
  • 1980년 남해군 무장공비 간첩선 침투 사건
  • 1983년 다대포 무장간첩 침투 사건
  • 1998년 여수 반잠수정 침투 사건
  • 1999년 제1연평해전
  • 2002년 제2연평해전
  • 2009년 대청해전
  •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침몰 사건
  •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
  • 2015년 8월 4일 DMZ 지뢰폭발사건
  • 2015년 8월 20일 서부 전선 포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