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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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위키는 절대로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입장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1995년 12월 21일, 대한민국 국회는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에 대해 당시 재판부의 판단을 번복하고 '민주화 운동' 이라고 명명을 하였고,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한 바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김대중 대통령님의 연설에 선동당한 우민들의 폭동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면책 조항에 따라서 구스위키의 일부 문서들에 서술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주장이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무장 소요 사태라는 주장 등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입장에 반하는 내용은 구스위키의 공식적 입장과 무관합니다. 그것은 독도에 대한 일본측 공식 입장을 소개한다고 해서 구스위키가 독도가 일본령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님과 일맥상통합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정식 명칭이며 광주민주항쟁 등으로 불리는 사건으로 이는 1980년 5월 18일에서 5월 27일까지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있었던 사건을 말한다. 사건 당시의 군부의 통제로 인해 언론매체는 '광주사태'로 칭했으나 군부 정권이 끝난 이후 이루어진 진상 조사의 결과는 이를 부정해, 광주사태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2011년 5월 25일 민간이 주도한 5·18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을 통과되었다. (신청인: 김영진 / 위원장 / 국회의원, 강운태 / 광주광역시 시장, 장휘국 / 광주광역시 교육감, 김윤수 / 전남대학교 총장, 전호종 / 조선대학교 총장, 김혁종 / 광주대학교 총장, 김준태 / 5·18기념재단 이사장, 정수만 / 5·18민주유공자유족회 회장, 양희승 / 5·18구속부상자회 회장, 신경진 / 5·18부상자회 회장, 안성례 / 5월 어머니집 관장)

광주시에서 제출한 유네스코 등재 신청서의 양식을 보면 등재 사유를 적는 내용이 주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증명은 유보한다. 별첨 문서에 따르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성공하더라도 등재된 기록물들의 내용을 공개하는 것이나 활용하는 것은 사전에 대한민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돈도 많고 자국 유산도 관리할 나라가 자국 기록물을 관리하지 않고 세계인들과 공유할 생각도 없는데도 유네스코는 이를 받아들여줬다. 오오, 대인배 유네스코. 오오! 훗날 이를 보고 배운 중국과 일본은 4년 뒤 각각 난징대학살 기록과 군함도를 유네스코 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상대 국가를 비난하거나 역사적 사건에 대한 공식 입장을 알리는 전쟁터로 유네스코를 이용했다. 반면 518 기록물을 등재해준 유네스코는 한국이 가져온 위안부 기록 유산 등재물은 딱지를 놓았다.

현재까지 폭동설을 주장하고 있는 집단은 시스템클럽, 일베 등 소수자들 뿐이다. 지금은 민주화 운동이라는 것이 다수설이다.

이 사건이 얼마나 뜨거운 감자인지를 보고 싶으면 사람들이 이 사건을 어떻게 부르는지를 보면 된다. 4.19 혁명이나 5.16 쿠데타, 12.12 사태 등은 4.19나 12.12 등 날짜로만 부르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데 이 5.18은 5.18이라고 날짜로만 부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한국 현대사의 사건 중에서 이렇게 날짜로만 부르는 사건은 6.255.16, 4.3, 5.18 정도밖에 없다.

목차

왼쪽&오른쪽의 보통 의견[편집]

일베저장소 등에서는 폭동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를 폭동이라고 할 근거는 매우 빈약하며 사실상 억지 주장이다. 정부에서 민주화운동으로 명명하였기에. 하지만 머리가 굵지 않은 10대~20대를 중심으로 한 일베충및 청년들은 그럴싸하게 짜 맞추어진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왜곡된 역사관을 갖게 되었고, 실제로 이와 같은 그릇된 인식이 점차 젊은 세대에 확산되고 있다는 것은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일베의 대한 반응은 대충 "5.18 폭동설은 착한 음모론이고 천안함 주작설은 나쁜 음모론이랑께요!"인가 보다. 일부 좌좀들의 천안함 음모론과 통베충들의 광주 폭동설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는데, 정부의 공식 입장을 부정하고 자기들 입맛에 맞게 각종 날조자료와 과장을 끼워맞춘다. 전두환 및 그 빠돌이들이 광주에서 시민들 상대로 일으킨 폭동이라 하면 '광주 폭동'이란 말이 그럴싸하게 들어 맞는다.[1]

일베의 의견[편집]

2011년 당시에만 해도 일베에는 폭동이라는게 중론이 아니었다. 오히려 5.18을 왜곡한 글이 일베로 잔뜩 받던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2012년부터 이상해지더니 2013년부터 폭동이라는 것이 중론이 되고 일반 의견은 '우덜식 논리'로 매도당함과 동시에 광주 피떡갈비 등으로 지들끼리 웃고 즐기는 것이 대세가 되버렸다. 일베가 천안함이 피습사건인걸 인정하지않고 이명박의 북풍 자작극이라는 음모론을 주장하는 좌좀이나 침몰사태라고 우기는 문재인놈처럼 되버렸다며 안타까워하는 보수들이 많다.

지나가던 수꼴씹선비의 비판[편집]

死상검증.jpg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게 인터넷 안에서 시끄러운 518사건이 민주화운동이냐 폭동이냐는 자기들끼리의 논쟁은 중요한게 아니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논쟁 상황은 광주의 가치하락을 바라는 일베의 시비와 그걸 방어하는 사람들의 싸움이지 그 사실관계의 싸움이 벌어지는게 아니란 얘기. 물론 그 시대에 산 사람들에게는 중요하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냥 아 그렇구나 하는 수준의 지식일 뿐이지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이런 미친 분위기에서 광주사태가 민주화 운동에서 폭동이 된다면, 당시 광주에 있던 사람과 함께 지금 광주에 살고 있는 사람까지 비난을 받게 될텐데 누가 인정하겠는가. 과거라면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을 수 있으나 지금처럼 일베가 세력이 커져서 악플러들이 난무하는 세상에 그런 일은 거의 없을 거라고 봐도 무방하다. [2][3]

일베충 새끼들이 정말로 제대로 이 의견을 주장하고 싶었다면 폭동같은 공격적인 말투가 아닌 정중한 말투로 키배에 임했을 것인데 그냥 전라도 까기위한 도구로 쓰이기에 그렇지 못한 놈들이 너무 많다. 그런 식으로 백날 해봐라. 결국 종편은 종편일 뿐이고 일베에서 민주화 폭동을 믿는 자료가 있는 것처럼 민주화 운동을 뒷받침 해주는 자료가 널리고 널렸는데 설득이 되겠는가?

광주사태를 다시보자는 의견은 분명 타당하고, 성역이 되어버린 광주 민주화 운동은 조금 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 될 필요가 있다. 그럴려면 폭동이나 땅크땅크 부릉부릉이 아닌 중립적인 단어로 부터 시작해야 했으며 여러 확실한 자료의 정리와 함께 생산적인 검증이 필요하다. 유네스코의 자료 등록은 되려 사건을 좀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중요한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우측의 생각이나 의견조차 밖으로 꺼냈다간 순식간에 민주화 당하게 된 지금 분위기는 일베놈들이 만들어낸 병신같은 이미지와 내부의 정신승리 분위기로 생긴 문제가 크다. 부끄러운줄 알아야지

그 비판 반박[편집]

5.18을 다시 보자는 의견은 타당하다고 하는데, 대체 얼마나 다시 봐야 한다는 말인가? 지금까지 정부기관에서 4번에 걸쳐 조사했다.[4] 뭔 애새끼들 재수 삼수하는것도 아니고 몇년째 애미없는 재평가 드립 애초에 좌파에서는 '민주화운동' 이라는 단어보다는 '민중항쟁' 이라는 명칭을 쓰는것을 선호한다. '민주화운동' 이란 명칭은 좌파에서 그렇게도 까대는 노태우 정부에서 정립된 명칭이다. 한 마디로 당시 좌우파가 합의한 명칭이라는 것.

좌파에서 그렇게 이를 갈며 싫어하는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의 평가를 보자. 재평가하자는 얘긴 있지도 않다. 이미 역사적 평가가 정립된 시점에서 재평가 운운하며 물고 늘어지는 것은 분열조장밖에 안 된다.[5] 있는데, 우파의 거두 정치인들도 국론분열을 바라지 않는데, 누굴 위한 폭동드립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나마 수꼴중에 씹선비라고 자칭하는 이들 윗문단 쓴 병신은, '너무 고평가됐다', '성역화 되었다' 는 개드립을 치는데, 이건 그냥 반대를 위한 반대일 뿐이다. 이건 그들이 그렇게 까대는 좌빨들이 심심하면 들고 나오는 레파토리, '천안함은 폭침이긴 한데 정부 잘못임. MB OUT' 이랑 다를 바가 없다. 마지막으로 유네스코 얘길 반박해보자면, 유네스코에서는 검증을 거쳐 폭동설, 북한군 개입설에 대해 허위라는 결론을 내렸다.동아일보 기사

야당 노빠들의 비판[편집]

사실 노빠들은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인정을 하나 우리 노빠들은 5.18을 전라도의 것으로 절대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왜냐면 비노측이 이걸 빌미로 호남의 지역감정을 부추기기 때문에 반대를 한다. 그리고 우리는 3김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5.18 민주화 운동보다 3김의 축이 되었지만 그래도 노무현에게 공천을 줬던 3당합당 전에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이 주도한 6.10 민주화 운동을 지지한다. 이걸 이용해처먹고 사자필승론 운운해서 지역감정으로 악용한 DJ와 선을 그어야 한다. 물론 5.18 민주화 운동은 6.10 민주화 운동의 시작점이라는건 인정하나 5.18 민주화 운동은 그저 시작점에 불과했지 마무리는 전국적으로 일어난 6.10 민주화 운동이다.

그리고 5.18 전에 이미 전머갈에 대한 타도 움직임이 일어났다. 김대중식 5.18 민주화 운동은 우리 노빠들은 원하지 않는다. 결국 호남이 아닌 전국구로 가야 하며 그리고 김현장, 최운용, 박남선은 이미 변절할대로 변절해서 3김 시대에 찌들어 사는 구태가 되었고, 여당을 지지했던 인간들이다. 그리고 5.18 민주화 운동도 말이 좋아 민주화 운동이지 소위 여야의 기회주의자들로 불리는 3김이 서울의 봄이니 뭐니 짝짝꿍하고 설레발 개레발치다가 전땅크한테 털려서 일어난 것이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인정하나 김현장, 최운용, 박남선과 같은 여당의 변절자들이 지지하는 꼴아지를 보니 3김에 대한 철퇴 차원에서 다시 재조명을 해야한다. 3김 주도로 이어진 운동이라면 이것에 대한 문제를 지적해야한다. 우리 노빠들은 영남,호남,충청을 구축한 3김 시대를 구태의 시대로 철퇴를 내린다. 그리고 전남도청 리모델링은 5.18 민주화 운동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길인데 이걸 까는건 뭐냐?

사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 5.18 민주화 운동으로 명칭을 정하는게 원칙이다.

그리고 박지원이 이새끼는 원조가카 시절에 졸부되고 전머갈 시절에 훈장도 받은 새끼가 왜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지지를 보내고 자빠지시나?

야당 노까들의 비판[편집]

이러고 보면 참 노빠들도 답이 없다. 뭐? 3김의 지역주의적 구도를 굳히기 위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싫다고? 6.10 민주화 운동도 더 좋다고? 그러면 병신들아 김영삼이 통일민주당 시절에 6.10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건 뭐냐? 5.18 민주화 운동 덕택에 6.10 민주화 운동이 있는거야 병신들아.

그리고 3김 시대 운운은 무슨 개소리를 하시나 김영삼의 지역주의에 의거한 줄공천질에 뇌물현이도 가담한건 모르지? 그래놓고 3당합당때 소신보인답치고 이기택이에게 빌붙고 나중엔 슨상님한테 가서 빌붙고, DJP연대에 암말 안하다가 DJP연대를 깠던 놈을 왜 보건복지부 장관에 쳐올려놓냐? 소위 3김에 이곳저곳 철새같이 빌붙어서 정권 만든 인간이 무슨 3김을 비난할 자격이 있냐? 3김 시대가 없으면 노빠들이 있을거같냐? 그 3김 덕택에 민주주의가 자리잡은거다. 지역감정 운운하지마라. 호남에게 빌붙어서 표받은 인간이 나중엔 부산 정권 운운하고 그랬던걸 생각해라.

그리고 노무현이라는 인간은 5.18 민주화 운동때 뭐했니? 박정희 정권때는 뭘 했니? 장기표도 오죽하면 노무현은 "노무현, 민주화 운동 제대로 한 사람 아니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노빠들이 했던 자랑스러운 운동은 모씨의 프락치 사건이라고 보여진다.

그리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말이 싫고 5.18 민주화 운동이라고 하면 아예 전국투어한 다음에 광주에 오는게 좋다.

그리고 박지원 운운하면 전두환, 노태우 시절에 대변인을 했던 이원영이는 5.18에 대해서 망언을 터트렸다. 이런 인간을 공천해준게 다름아닌 노빠들이다. 그리고 박지원이는 당시에 공인도 아니였고, 이원영이는 엄연히 국회의원 신분으로 그 지랄을 떨었다.

회색주의적 비판[편집]

이렇듯 당리당략은 물론 심지어 야당내에서도 저꼴아지니 5.18 민주화 운동이 항상 당리당략의 중심이 되고, 그것도 모자라서 계파 싸움의 중심이 된다면 차라리 급을 부마항쟁으로 낮추는게 옳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해본다.

저렇게 당리당략의 중심이 되고 계파간 싸움으로 번질바엔 그게 차라리 나은거다. 보상금 지급 문제도 부마항쟁을 했던 사람들 수준으로 계속 하면 되는거고, 그리고 저걸 여론에서 미친듯이 부추겨서 더 당리당략과 더 계파 싸움의 장이 마련되는 짓도 웃기다.

여당과 야당의 비노측에서 3김의 유산을 붙잡는 것도 웃기고 여당과 야당의 친노 측에서 전국구라고 말하는 것도 웃긴데, 저 문제에 있어서 정치권이 손을 떼고, 정치적 중립성을 준수하고 있는 행정기관에 공무원들이나 혹은 국민들의 판단에 맡기는게 가장 좋다. 왜 꼭 정치권에서 계속적으로 터치를 하는지 이해가 안간다..

이것과 관련해서 황당한 일이 있는데

2016년에 5.18과 관련된 님을 위한 행진곡에 대해서 제창과 합창 문제가 있는데, 당초 정부가 대통령이 국민들의 국론분열을 막기 위해서 어떻게 해봐라고 해서 지시를 내리고 처음에 제창쪽으로 무게를 두기로 결론내렸는데, 정작 정부는 참석자들의 자유권을 인정하는 합창을 결정내렸는데, 새누리당은 국민들보단 광주 시민들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며 시민들의 여론을 무시한 황당한 처사라고 했고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의당과 상의를 하고 우리하곤 상의를 안했다고 무시를 받앗고 국민의당은 제창을 하기로 한 약속까지 직접 가서 받아냈는데 뒤통수를 맞았다. 참 황당할 지경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탈북자들의 의견은 탈북 출신에 주성하 기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북한 주민들이 모르는 곡이다."라고 말할 지경이었다. 아니 이 운동의 정체가 뭐야?

사건 발단[편집]

3김의 서울의 봄[편집]

소위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해서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3사람은 독재에 대한 포기를 선언하고 민주주의 사회 구축을 위해 회담을 했는데, 이것에 열받은 전머갈이 이들을 눈엣가시로 여겨 이 3김을 숙청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대학생 시위와 계엄군의 폭력[편집]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 5월 18일당일 아침 9시 이후, 텔레비전 방송, 라디오, 신문을 통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 소식이 보도됐다. 5.17 쿠데타로 비상계엄이 전국(그래봤자 제주도 하나 추가)으로 확대된다. 전남북 대학교들은 7공수여단이 점거하고 학교안에서 야자를 하던 학생 79명을 연행했다. 아침이 됐고 전남대 정문에선 학생들이 '계엄해제'를 외치며 시위를 했다. 그러자 2개지대가 증원됐다. 시위학생들은 돌을 던지며 시위했다. 공수부대원들은 해산을 위해 진압을 했고, 학생들이 도망가자 인근 집이나 상가까지 쫒아갔고 시내버스가 근처에 지나갔는데, 거기서 항의하던 학생들도 폭행하고, 신분을 밝힌 전남대 교수까지 폭행한다. 학생들은 전남대에서 물러나서 시내로 간다.[6] 여기까진 흔한 과잉진압.

계엄군의 무차별 공격[편집]

신군부는 신속하고 강력한 시위진압을 위해 5월 18일 오후 4시 제7공수여단을 시내에 투입했다.[7] 제7공수여단은 시위 학생이 아닌 일반 행인들에게도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이에 학생들은 반발하며 광주 도심으로 옮겨가 시위를 계속했으나 계엄군이 곤봉과 대검으로 학생과 일반 시민을 가리지 않고 살상했다.[8]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무차별 살육을 가한 사례들이 이러하다.

  • 북동 276번지 3층 건물에서 2층에는 동아일보 광주지사가 있고, 거기에는 정은철 총무와 배달학생들과 도망 온 시민 3명이 있다. 공수부대원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와 도망 온 시민 3명을 짓밝고 개머리판으로 짓이긴 뒤 데리고 갔다. 한참 뒤, 두 군인들은 다시 들어와 정은철 총무 뒷덜미를 낚아챈다. 정은철 총무는 업부를 보던 상태였다. 정 총무는 의자와 함께 넘어졌고 두 군인들은 정 총무를 마구 짓밟고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다. 정 총무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꿈틀거렸고, 두 군인은 정 총무의 두 발을 양쪽에 하나씩 붙잡고 끌고 갔다. 머리는 땅바닥에 끌린채였다. 그 뒤, 두 군인들은 또 들어와서 담당구역 수금하고 들어왔던 배달학생 박준하 씨를 진압봉으로 수도없기 때리고 짓밟은 뒤에 정 총무처럼 끌고 나갔다. 박준하 씨는 계단에서 실신했고, 두 군인은 그대로 팽개쳐두고 내려갔다.[9]
  • 군인들은 부부들이 탄 택시를 붙잡았다. 부부들은 끌려나왔고 군인들은 몽둥이와 장작개비와 군홧발 세례를 먹인다. 신부는 치마저고리가 갈기갈기 찢기고 신랑은 아프다며 소리를 질렀다. 군인들은 '빨리 꺼져'라고 소리를 질렀다.[10]
  • 군용트럭이 11대가 줄을 지어서 행렬해 있다. 그 대열에서 마지막 차량에 젊은 여성은 옷이 갈기찢겨 젖가슴이 보일정도였고, 그 옷은 피투성이였다. 병원 옷을 입은 사람이 하얀 간호사 가운을 들고 나왔다. 병원 옷을 입은 남자는 옷을 여자에게 주려다 군인들에게 붙잡혀 군홧발과 몽둥이 세례를 받았다.[11]
  • 조선대 의대 4학년 재학중이던 이민오 씨는 광주일고에서 하는 동문 체육대회에 참여했다. 그런데 주변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쫒아왔다. 이민오씨는 교장관사까지 도망쳤지만 거기까지 쫒겨 구타당했다. 췌장과 비장이 파열됐다.[12]
  •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구타를 당한다. 결과 뒤통수가 깨지고 눈이 터졌으며 팔과 어깨가 부셔졌고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졌다. (후두부 찰과상과 열상, 뇌안상검부열상, 우측 상지전박부 타박상, 좌견갑부 관절부 타박상, 진경골부, 둔부와 대퇴부 타박상)[13][14][15][16] 그는 광주 적십자병원으로 후송됐지만 뇌출혈로 이튿날 새벽 결국 사망했다.[17]

이것때문에 광주시민들이 빡이쳐서 공수부대에게 대들게된다. 광주시민들이 격렬하게 항쟁한게 19일부터인데, 시민들이 슨상님이 잡혀한걸 알게된건 20일부터다. 슨상님 살릴려고 시민들이 기를 쓰고 싸운게 아닌거다. 조갑제도 자기가 봤는데 김대중 외치는 사람은 없고 김일성 오판말라면서 가끔 빨갱이같은 애들 잡아다가 군에 넘기더라고 한다.

당시 계엄군은 계엄군 나름대로 빨갱이 잡는다고 가봤더니 졸지에 시민들을 공격하게 되어 진압에 투입된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편하게는 잠을 못 잔다고 카더라.

명칭에 관하여[편집]

신군부의 군사독재와 폭력에 맞선 민중항쟁을 광주 민중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강조한 ‘광주민중항쟁’ 또는 ‘광주항쟁’이란 명칭도 지역 사회와 5월 단체 등을 중심으로 1980년대부터 사용됐다.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딴 ‘5·18’도 널리 통용되는 명칭이다. 기타 ‘광주 항쟁’, ‘광주 민중 항쟁’, ‘광주 의거’, ‘광주 자유 민주 의거’, ‘광주 민주 의거’, ‘광주 학살’,‘5월 항쟁’, ‘5·18 민중 항쟁’, ‘광주 시민 항쟁’, ‘광주 민중 항쟁’ 등의 다른 명칭도 존재한다. 한편 민주화 운동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의견을 가진 이들은 ‘광주사태’, ‘광주소요사태’, ‘광주폭동’, ‘광주힐링운동’ 등으로도 부른다.

5.18에 대한 왼쪽 의견[편집]

광주의 위대한 정신은 우리만의 자랑이 아니라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믿고 숭상하는 전 세계인의 자랑이며 인간승리의 대서사시입니다.

 
해상방위대 목포해군경비보위 도요타 다이쥬 슨상님

5·18은 역사에 많은 의미를 남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군부와 언론에 의해 폭도로 매도돼 무참히 짓밟혔던 그날의 광주는 목숨이 오가는 극한상황에서도 놀라운 용기와 절제력으로 민주주의 시민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너와 내가 따로 없이 부상자를 치료하고 주먹밥을 나누었습니다. 시민들의 자치로 완벽한 민주질서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대화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세계 시민항쟁의 역사에 유례가 없는 민주시민의 모범을 남겼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보기 어려운 일이었어요. 정말 놀라운 일이지. 무기가 수천 정이 풀렸는데 강도 사건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물자가 부족했지만 아무도 매점매석한 사람이 없었고. 그게 바로 대동세상이죠. 그때를 생각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있어요

 
— 한홍구

5.18에 대한 오른쪽 의견[편집]

구 보수 정당[편집]

지금의 새누리당이 생기기 전 3당 야합 이전 여당 정당인 민정당과 민자당, 그리고 그 이전의 보수 정당들에 입당해 활동한 정치인들을 가르킨다. 정치 입문은 구 보수 정당으로 하였으나, 중간에 당을 깨고 나와 신 보수정당으로 옮긴 노태우(민정당)와 김종필(민자당)과 같은 철새들은 최종 활동을 한 정당으로 분류한다. 이러한 분류법은 타당한데 빅토르 안의 국적을 러시아라고 하지 대한민국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5ㆍ18 사태는 ‘폭동’이란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빼앗은 장갑차를 끌고 와 국군을 죽이고 무기고에서 탈취한 총으로 국군을 사살한 행동을 3.1 운동과 같은 운동으로 부를 순 없다"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진 것은 광주사태 당시의 희생자 수”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1980년 6월 광주지검이 민ㆍ관ㆍ군 합동으로 집계한 민간인 사망자 수는 165명” “165명 중에는 총기 오작동으로 인한 사망자, 음주운전ㆍ과속으로 인한 교통사고 사망자가 포함돼 있고 계엄군이 사용하지 않은 카빈총 등에 의한 사망자도 적지 않다” “5ㆍ18의 충격이 가시기 전에 대통령이 된 게 원죄가 됨으로써 십자가(제물)를 지게 됐다”

 
DH

민주 + 보수세력[편집]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 생긴 보수 정당들(새누리당)

오늘의 정부는 광주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위에 서 있는 민주정부

 
YS

8년 전 오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숨져간 민주 영령들 앞에 온 국민과 함께 고개 숙여 명복을 빕니다. 그 날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시는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들께도 충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역사의 고비마다 정의와 진실을 위해 앞장서 온 광주시민과 전남도민 여러분을 저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크나큰 아픔으로 남았지만 우리가 지금과 같은 민주화사회를 이루는 데 큰 초석이 되었습니다. 우리 국민은 지혜로웠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을 과거의 사건으로 묻어두지 않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한 동력으로 승화시켜, 위대한 민주주의의 진전을 이루어 냈습니다

 
이명박, 2008년 5.18 기념식 기념사 중 일부[18]

5.18은 민주화운동이며 민주화를 위한 희생이었다.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만들어 광주의 희생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박그네,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한 뒤.

노태우 前 대통령, 광주민주화 노력 인정

 
노태우 前 대통령의 핵심참모인 손주환 전 공보처 장관.

5.18을 민주주의 운동의 상징으로 승화시켜 나가자

 
김종필 前 총리 5.18 광주민주화운동 19주년 기념사.

현재의 명칭인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이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명칭이자 표현이다. 오른쪽에서 열심히 빠는 조중동에서도 이렇게 쓴다. 처음 1988년 보통사람이 대통령을 하던 제 6공화국에서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사건을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하면서 나왔고, 이후 정부의 공식 언급에서도 이 명칭이 사용됨으로써 공식 명칭화되었다. 그러므로 교과서에도 당연히 이렇게 쓴다. 참고로 말하지만 5.18이 광주 민주화 운동이 된 것에는 전두환과 김종필의 관계가 악연 역시 매우 컸었다. 다시 말해서 김종필을 부정축재자로 몬것이 5.18이 민주화 운동이 된 결정적 쐐기를 박았기 때문이다.

어째서 폭동떡밥이 생겼는가[편집]

좌파들의 권위적 모습에 대한 반항[편집]

일베가 활성화되어 스스로의 커뮤니티를 이루기 이전(즉, 말 그대로 디시인사이드의 일간베스트 게시물을 저장하던 저장소 시절)에 디시 정치,사회갤러리(또는 국내야구갤러리)에서 이미 그 기원이 발생하였다.

왼쪽세력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항시 까왔고 그 주요 레퍼토리는 박정희 시기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경제발전 업적에 대한 폄하와 박정희 정권의 독재성 부각이었다. 이에 오른쪽세력이 주장한 대응논리 중 하나는 '김대중보다는 업적이 낫다'였고, 이에 또 왼쪽세력이 꺼내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은 '민주화 유공'이었다.

그러나 '민주화 유공'이라는 포괄적인 단어는 딱 와닿지 않아 확실히 그 해석에 애매함의 여지가 있었고 오른쪽세력이 재차 '대체 민주화 유공이라는게 뭐냐?'며 물어보자 이에 왼쪽세력이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하였고 이러한 현상이 계속 반복되면서 '민주화'라는 단어에 대해 '좌파(민주당·전라도)가 자기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드는게 민주화냐'라며 비꼬는 의견이 점차 등장하게 된다.[19]

빠가 까를 만든다고 하였던가. 김대중에 대한 과도한 빠심이 오히려 김대중에 대하여 샅샅히 까뒤집어버리고 싶은 까들의 욕구를 자극하였고 그 결과 홍어[20], 목포해상방위대, 제갈대중 등이 발굴되었고 그리고 5·18 광주민주화 운동이다.

앞서 '민주화'라는 단어가 이미 왼쪽세력의 과도한 의미부여로 인해 오히려 희화화되고 있던 와중에 또한 5·18 광주민주화 운동에 대하여 어마어마한 의미를 부여하는 빠들의 과도한 빠심이 역시나 까들을 제조하였고 까들이 샅샅히 파헤쳐보니 시민군의 무장, 과도한 보상, 실질적으로 전두환이 물러나게 했던 6월 항쟁 및 박정희 집권 말기에 벌어진 부마항쟁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평가, 민주화에 있어 실제로 거둔 성과가 없다 등등의 문제점이 대두되었다. 결국 '민주화' 단어와 같이 평가절하 및 희화화의 운명을 걷게 되었으며 이를 극단적으로 표현하게 된 것이 광주폭동이다. 한마디로 폭동설이 등장하기 이전에 폭동이란 단어부터 나왔고, 폭동설에 나오는 근거들은 나중에 수집된 것들이다.

그냥 인터넷 훌리건들 드립에 살이 붙은것 뿐[편집]

야갤의 지역드립은 타사이트에서 매우 악명이 높다. 야갤러들의 행동을 보면 자기팀을 어떻게 띄워주고 상대팀을 어떻게 하면 좀더 빡치게 할수있을까 드립을 연구하는 모습을 보이며 그야말로 인터넷 훌리건들이 따로없다. 폭동드립도 이런 수많은 드립중 하나일 뿐이였으며 폭동드립에 홍빠들이 풀발기하는 모습을 보고 야갤러들은 폭동드립을 즐겨 썼으나[21]폭동설을 진지하게 믿는 야갤러는 없었다. 그러나 인터넷 전반적으로 홍어 드립이 퍼져나가자 이걸 정치적으로 악용할려는 자들이 나타났다. 단순히 조롱용으로 사용되던 폭동드립은 살이 붙어가면서 사실로 둔갑하기 시작했으며 기껏해야 홍빠들을 까기위해 폭동드립을 치던 자들도 광폭설을 진지하게 믿게 되었다.

구 열린우리당과 구 민주당 의원 출신들과 그 지지자들의 발언과 전땅크와 커넥션[편집]

참고로 예전부터 줄곧 야당을 해온 정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전두환 노태우 대변인을 했던 이원영이 열린우리당 의원이 5.18때 계엄군을 보낸 것은 질서 유지 차원이 아니였는가? 이렇게 이야기하자 이원영은 "네 그렇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했다. 현 정부나 여당의 의원이 저런 발언을 어지간해선 하지 않으나 그것도 참여정부 시절에 저런 발언을 했다는 것은 기존 보수 우파들조차도 어리둥절하기 그지 없었다. 민주당 입장에서는 즉각 총공세에 나섰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물어본 사람은 장성민인데, 그 사람은 5.18 사태라고 했고 구 민주당 의원 출신이었다. 또 뿐만 아니라 박지원은 5.18때 계엄군을 보낸 것은 영웅적인 결단이라고 말하다가 지금도 친노들 사이에서도 그 발언이 도마에 오른다. 근데 이원영은 참여정부 시절 의원이었다.

위에 두가지 이유도 있겠으나 가장 결정적으로 현 야당의 옛 전신들과 지금의 야당이 그동안 너무나도 많은 분당과 분열을 했고, 이념의 스펙트럼을 너무나도 지나치게 넓히다 보니깐 필요하다면 과거 전두환 시절 사람들까지도 썼고, 저런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나왔던 것이 문제였다. 새누리당과 정부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과 연결되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공격하다가 권력만 잡으면 땡이라는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다보니 당리당략에 맞으면 저런 발언들도 허용했던 것이다. 참고로 새민련에도 5.18때 망언을 했던 사람이 현 야당의 원로로 있다. 이러니 보수우익들의 그러한 발언들은 더 설득력을 얻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추가로 더 이야기하자면 김한길 아버지가 김철이라는 국보위 출신의 인사라고 한다. 물론 사과는 없었다.

폭동설에 대한 정리와 그에 대한 반박[편집]

북한군 개입설이 확산되는 7년간 기자도, 정부도 손을 놓고 있었다. 반박되지 않는 거짓은 진실이 된다.
 
— 조갑제
선동은 문장 한 줄로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고 할 때면 이미 사람들은 선동당해 있다.
 
— 파울 요제프 괴벨스[22]

광주 폭동설은 이미 선동당해서 자신들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좌빨마냥 '안 보여요, 안 들려요' 로 일관하는 이들도 많으며, 내세우는 주장이 정말 다양하다. 진성 일베충들도 자기네들 주장을 하나로 일치시키지 못하며, 그 근거라고 내미는 자료도 뒤죽박죽이다.[23] 이 단락에서는 광주 폭동설의 주요 레파토리와 그에 대한 반박을 정리한다.

무기를 들고 일어났으니 폭동/사태?[편집]

광주폭동.png

가장 간단명료하면서도 흔해빠진 주장. 그만큼 그 근거도 빈약하다. 그냥 근거가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이것은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대법원 판결문만 가져와도 반박이 된다.


(전략)…비상계엄의 전국확대조치의 그와 같은 강압적 효과가 법령과 제도 때문에 일어나는 당연한 결과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법령이나 제도가 가지고 있는 위협적인 효과가 국헌문란의 목적을 가진 자에 의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에는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조치가 내란죄의 구성요건인 폭동의 내용으로서의 협박행위가 되므로 이는 내란죄의 폭동에 해당하고, 또한 그 당시 그와 같은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는 우리 나라 전국의 평온을 해하는 정도에 이르렀음을 인정할 수 있다.

(중략)…5·18내란 행위자들이 1980. 5. 17. 24:00를 기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등 헌법기관인 대통령, 국무위원들에 대하여 강압을 가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에 항의하기 위하여 일어난 광주시민들의 시위는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내란행위가 아니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난폭하게 진압함으로써,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에 대하여 보다 강한 위협을 가하여 그들을 외포하게 하였다면, 그 시위진압행위는 내란행위자들이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을 강압하여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한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

(중략)…계엄군이 난폭하게 광주시민의 시위행위를 진압한 행위가 내란죄의 구성요건인 폭동의 내용으로서의 폭행·협박에 해당함은 명백하고, 기록에 의하면, 피고인들이 국헌문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그러한 목적이 없는 계엄군을 이용하여 위와 같이 난폭하게 시위를 진압하였음을 알 수 있으므로, 이는 피고인들이 간접정범의 방법으로 내란죄 등을 실행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중략)…정당행위가 성립하기 위하여는 건전한 사회통념에 비추어 그 행위의 동기나 목적이 정당하여야 하고, 정당방위·과잉방위나 긴급피난·과잉피난이 성립하기 위하여는 방위의사 또는 피난의사가 있어야 한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원심은 피고인들이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시국수습방안의 실행을 모의할 당시 그 실행에 대한 국민들의 큰 반발과 저항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하여 '강력한 타격'의 방법으로 시위를 진압하도록 평소에 훈련된 공수부대 투입을 계획한 후, 이에 따라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진압봉이나 총 개머리판으로 시위자들을 가격하는 등으로 시위자에게 부상을 입히고 도망하는 시위자를 점포나 건물 안까지 추격하여 대량으로 연행하는 강경한 진압작전을 감행하였으며, 이와 같은 난폭한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분노한 시민들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서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발포함으로써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그 후 일부 시민의 무장저항이 일어났으며, 나아가 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 귀중한 국민의 생명을 희생하여서라도 시급하게 재진입작전을 강행하지 아니하면 안될 상황이나 또는 광주시민들이 급박한 위기상황에 처하여 있다고 볼 수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위를 조속히 진압하여 시위가 다른 곳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지 아니하면 내란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자, 계엄군에게 광주재진입작전을 강행하도록 함으로써 다수의 시민을 사망하게 한 사실을 인정하였는바, 기록에 비추어 살펴보면, 원심의 위와 같은 사실인정은 정당하고, 거기에 상고이유로 지적하는 바와 같은 채증법칙 위반으로 인한 사실오인 등의 위법이 있다고 할 수 없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피고인들이 위 계엄군의 시위진압행위를 이용하여 국헌문란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 행위는 그 행위의 동기나 목적이 정당하다고 볼 수 없고, 또한 피고인들에게 방위의사나 피난의사가 있다고 볼 수도 없어 정당행위, 정당방위·과잉방위, 긴급피난·과잉피난에 해당한다고 할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다.


 
— 대법원 199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문 중 일부발췌

판결문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폭도는 전두환, 노태우고, 시민들은 폭도에 맞서 싸운것이다. 전두환과 그 일당은 내란죄로 처벌을 받았는데, 내란죄는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國憲)을 문란시킬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죄(형법 87조)' 다. 법적으로 폭도는 전두환과 그 일당이라는 판결이 났는데, 시민들을 폭도라고 주장하는 병신논리다. 끝까지 인정 안 하고 '그래도 시민들이 무기를 들고 폭력으로 대응해서는 안 됐다' 는 주장하는 애들도 있는데, 그럼 농민들이 무기를 들고 저항한 동학농민운동3.1 운동은 뭔가?[24]

미국도 폭동이라고 생각한다?[편집]

미국 수도인 워싱턴 D.C에 있는 헤리티지 재단[25]에서 1985년에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작성한 보고서가 '미국도 폭동이라고 생각한다' 는 주장의 근거로 자주 인용된다.원문링크
번역문은 아래와 같다.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광주사태를 강력한 도구로 활용했다. 반대자들은 정부가 사전에 모의하여 광주시민을 잔인하게 학살했다고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꼼꼼히 조사한 결과 이러한 주장은 과장된 것이었다.

10.26이후 최규하 국무총리가 잠정적인 대통령이 됨으로써 격렬한 정치투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숙청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었고, 야당인 신민당은 김대중과 김영삼 사이에 당권경쟁이 치열했다. 1980년4월, 김대중은 당내 지지세력이 미약함을 파악하고 그의 정치적 기반을 당 밖에서 찾겠다고 선언했다. 경제사정이 악화됨에 따라 정치 불안은 더욱 격심해갔다. 학생들은 등교하자마자 곧바로 계엄철폐를 요구하며 거리투쟁으로 나갔다. 탄광노조가 폭력시위를 일으켜 경찰관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4월16일, 김대중은 계엄포고령을 무시하고 서울에 운집한 학생들 앞에서 투쟁을 고무하는 연설을 했다. 4월 중순에 노동시위가 경찰관을 살해했다. 5월15일 서울의 학생시위가 또 한사람의 경찰관을 살해했다. 곳곳에서 대규모 군중시위가 일어났다. 5월16일, 학생조직 대표들이 이화여대에 모여 5월22일을 기해 계획된 전국규모의 시위를 지지한다는 결의를 했다.

폭력의 위험수위가 상승하고 있는 가운데 최규하 대통령이 5월17일 자정을 기해 계엄을 강화할 것을 명령했다. 대학에 휴교조치가 내려졌고,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주요도시에 계엄군이 배치됐다. 계엄군 배치계획에 따라 7공수 여단의 33 및 35대대가 광주시의 북쪽(금마)에서 광주사내로 이동했다. 이 때 광주시 인구는 80만이었다. 여러 곳에서 남한을 뒤흔들던 시위는 끝이 났음에도 유독 광주에서는 폭동(riot)이 일어났다.

5월18일, 전남대 앞에서 수맥명의 학생이 투석을 하여 군과의 격돌을 야기시켰다. 다음 날 시위자들은 경찰서와 방송국2개를 습격하고 재산을 파괴했다. 쇠파이프로 무장한 시위자들은 매우 공격적이고 적대적이었다. 백병전을 본 사람들은 두 가지로 말했다. 한쪽은 경찰과 군인들이 너무 난폭했다고 말하는 반면 다른 목격자들은 대부분의 군인들이 시민과의 격돌을 피하였다고 증언한다. 극심한 격돌로 부상자들이 속출했지만 초기의 격돌 2일간의 사망자는 2사람뿐이었다. 폭력사태가 악화된 데에는 지역삼정이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전라도 주민들은 수백 년 동안 중앙정권에 의해 차별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경상도 사람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전라도를 차별하고 경상도에만 혜택을 주었다고 말한다. 이어서 격돌이 발생한 것은 김대중을 체포하는 등 계엄확대가 처음부터 전라도를 표적으로 한 조치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소요 첫날부터 뜬소문이 돌았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들을 죽이러 왔다는 것이다. 첫날에는 사망자가 전혀 없었지만 이날 소문은 40명이 죽었다고 했다. 김대중씨가 처형됐다는 소문도 돌았다. 해괴한 소문에는 군인들에게 밥을 며칠 간 굶기고 마약을 투여하여 군인을 흥분시켰다는 내용도 있었다. 시민들은 이 뜬 손문을 믿고 시위에 동참했다.

5월20일 폭도들(rioters)은 시청과 텔레비전방송국에 불을 질렀다. 버스와 택시를 강제 징발하여 도로 위를 달렸다. 도청건물 앞에서는 이를 차량중 하나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하여 4명의 경찰관을 숨지게 했다. 정부당국도 제어 기능을 발휘할 수 없을 만큼 사태는 악화되었다. 이런 사태는 5월21일 아침까지도 계속되었다. 폭도들이 예비군 무기고를 공격해 소총과 실탄 기타 무기들을 탈취하면서 사태는 불길한 방향으로 이어졌다. 오전 9시경 자동차 공장이 습격을 받았다. 장갑차를 포함한 수백 대의 차량이 탈취되었다.

동시의 인접지역 소도시에서도 군경시설이 습격을 받아 수백정의 총기들이 탈취되었다. 화약재조 업자들로부터 다량의 TNT도 탈취했다. 오후에는 폭도들이 건물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 해놓고 군인들을 향해 사격을 했다. 광주교도소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이 장갑차와 소방차에 분승한 중무장한 폭도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 공격은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반란의 규모가 확대되자 군인들은 5월21일 오후 6시에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 이르렀다. 이로서 광주시는 완전히 반란군중(rebel)에 수중에 들어갔다.

최초에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들은 그들보다 훨씬 더 폭력적인 극렬분자들에 의해 주도권을 빼앗긴 것을 알고 아연실색했다.“이건 우리의 의도가 결코 아니다.”당초 시민들은 폭넓은 지지를 표했으나 폭력이 극심해지자 충격을 받았다. 5월22일에는 의사, 변호사, 언론인, 종교지도자들을 포함한 60여명의 유지가 광주 사태수습시민위원회를 구성했고 이들은 정부 당국과 난동군중 중간에 서서 협상을 맡아 나설 것을 자청했다. 탈취된 무기는 소총 5,008정 엽총395정, 실탄288,680발, 수류탄526발, 다이너마이트 3,000상자로 집계 되었다. 5월23일까지 사태수습시민위원회는 약간의 성과를 거두는 듯 했고 광주시에는 평온이 찾아오는 듯 했다. 약간의 무기가 반납되고 무장시위대 34명이 자수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사태는 악화방향으로 돌변했다. 선동분자들이‘앞으로 며칠만 버티면 정부는 쓰러진다.’고 외쳤다. 산발적 접전이 도시주변에 배치된 군 병력을 상대로 재발했다. 다음날에는 또 다시 시내에서 대규모 군중시위가 일어났다.

5월26일 계엄군은 시내로 진출하기 위해 몇 개 방향에서 시도를 했으나 시민군은 격렬하고도 조직적인 저항을 했다. 시민군은 체계를 갖춘 지휘체제를 확립하고 광주시를 더욱 튼튼히 틀어쥐고 있었다. 계엄당국은 드디어 행동을 결심했다. 계엄군은 탈환작전을 개시하기 전에 인명과 재산에 대한 피해 극소화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수립했고 행동했다. 공중정찰에 의한 사진뿐만 아니라 광주시내에 있는 정보 제보자들을 활용함으로써 반란 시민들의 본거지와 거점들을 하나하나 정확히 확인했다. 그리고 5월 27일 시민들이 잠든 새벽 1시에 계엄군들은 행동을 개시했다. 병력을 소부대단위로 편성하고 외과적 정밀 조준으로 목표에 타격을 가했다. 작전은 수 시간 이내에 완료되었고 사살된 사람은 17명에 불과했다.

대결상황이 계속된 전 기간 중 정부와 계엄당국은 협상에 의한 사태수습을 애써 시도했다. 5월22일에는 국무총리가 광주에 와서 질서회복을 호소했으며 5월22일에는 최대통령도 광주에 와서 같은 호소를 되풀이 했다. 광주시 전역에 무기반환을 호소를 하는 전단이 살포되고 헬리콥터와 비행기 차량이 확성기를 달고 호소문을 전파했다. 계엄당국은 광주시민위원회에 협력했으며 시민위원회를 중간에 두고 폭도 대표들과 5회에 걸쳐 접촉을 하면서 협상을 시도했다. 신뢰회복을 위해 연행했던 시위자들을 여러 차례 풀어놓기도 했다. 그 결과 상당수의 투항자가 있었고 무기도 다소 반환되었으나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후유증 정부가 사망자 191명, 부상자852명(중상자122명)이었다고 발표하자 많은 사람들은 웃기는 자료라 하면서 믿지 않았다. 이 불신은 일부 외신 보도와 반정부 인사들의 언동에 기인한다. 외신보도는 정부의 공식발표를 인용하면서도 불신하는 내용들을 보도했다. 어떤 외신은 적어도 1,000명은 죽었다고 잘라 말했고 어떤 이는 2,000명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5월27일 이후 중간에서 협상에 참여했던 시민위원회는 계엄사와 합동으로 철저한 시체 확인과 검시 작업에 들어갔다. 민간의사들, 군의관들, 성직자들, 변호사들 그리고 광주시민을 합하여 49인이 조사와 확인 작업에 참여했다. 광주에서 오래 거주한 기독교 목사인 시민위원회 위원장은 본 헤리티지 재단과 면접한 자리에서 자신이 사망자 시체 확인을 했다고 밝히고 191명의 숫자는 정확한 것 이였다고 강조했다. 사상자가 발생한 원인은 군인들이 무고한 시민들을 상대로 무차별 난사한 것에 의해 일방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쌍방의 중무장한 무력 집단 간의 격돌이 초래한 필연적 결과였다. 광주교도소에서는 50명 이상이 죽었는데 이것은 중무장한 폭도들이 정부군이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는 광주교도소를 수차 강습하면서 이어진 공방전에서 사살된 것이다. 정부는 광주지역 원호단체들과 협조하여 모든 사망자 가족에게 16,000달러 상당을 각각 지불했으며 모든 부상자들에게 치료비를 보상 했다. 기타 시민들에게 비상식량과 연료비조로 200만 달러 상당이 지원됐다. 파괴된 가옥과 영업소에 대해서는 수리와 복구를 위한 지원 예산이 집행됐다. 구속된 시민들은 2,522명이며 이중 404명이 군법재판에 회부되어 3명에 대해 사형, 7명에 대해서는 종신형이 선고 되었으나 추후 형량은 모두 감경 되었고 그 후 사면조치로 풀려 나왔다. 현재 광주 사건으로 복역 중인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반대자들은 미국을 한국정부와 공동 모의했다고 비난한다. 광주시에 투입된 한국군 부대의 사용에는 미국의 사전허가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옳지 않다. 한미연합군은 북한이나 기타 외국의 위협으로부터 한국을 방어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한국정부가 국내목적에 한국군 병력을 사용하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의 고유 권리다.

광주사태는 한국정부가 죄 없는 전라도 도민을 학살할 의도와 목적아래 사전에 모의해서 만들어낸 사건이 아니며 미국이 게재된 사건도 아니다. 이 반란사태(insurrection)의 규모가 방대함을 생각한다면 사망자 수는 상대적으로 근소한 것이며 이 사실은 한국정부가 인명피해를 극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했기 때문인 것으로 인정된다.


 
— 헤리티지 재단, 1985년 9월 16일 작성 보고서.

글 내용만 놓고보자면 '호옹이? 정말 폭동이라고 해 놨네?' 라는 말이 나올 법 하지만, 당시의 상황은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이다. 미국에서 구할 수 있는 자료와 정보는 많지 않았으며, 한국의 언론과 출판은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다. 노태우가 '6.29 선언' 을 한 1987년 이후의 보고서들을 보면 '신군부에 의한 학살', '민주화 운동' 등의 단어를 사용하며 서술논조를 정 반대로 바꾼것을 확인할 수 있다.1988년 보고서2005년 보고서2011년 보고서
사실 이 주장자체가 오류인데, 헤리티지 재단은 미국 정부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있는 곳이 아니다. 그냥 일개 재단에서 보고서를 쓴 것인데, 그것을 마치 정부의 공식입장인 양 왜곡하는 것.노무현재단이 한국 공식입장이라고 할 기세네

당시 대통령 최규하의 민정이양 약속을 무시하고 폭동을 일으켰다?[편집]

박정희가 사망한 이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가 통일주체국민회의일명 체육관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최규하가 당선이후 민주적 헌법으로의 개헌과 정권 이양을 약속했는데, 그것을 믿지 않고 시위를 벌이고 더 나아가 무기까지 들었으니 폭동이라는 주장이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보면, 박정희 사망 이후에는 계속 계엄령이 선포되어 있었다. 이 계엄령 선포의 명분은 '대통령의 유고로 인해 국가의 안보가 위험해질 우려가 있다' 는 것이었다. 소련이 건재하고 냉전이 한창이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적절한 조치였다고 할 수 있으나, 문제는 대통령이 새로 당선됐음에도 계엄해제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국의 대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5월 14일 전국 32개 대학 가두시위

그러자 당시 국무총리였던 신현확은 늦어도 연말까지 개헌안을 확정하고 선거를 실시해서 민정이양을 하겠다는담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날인 5월 17에 정부는 신군부의 주도하에 보안의 예비검속을 통해 김대중, 김종필를 비롯한 주요 정치인들을 합동수사본부로 불법 연행했다. 통수를 제대로 친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신군부는 비상 계엄령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하고, 이와 동시에 계엄사령관 이희성 명의로 '계엄포고 제10호'를 발령하면서 정치활동 금지, 대학교 휴교령, 언론보도 사전검열 강화, 집회 및 시위 금지 등의 조치를 내렸다. 이것이 흔히들 말하는 5.17 쿠데타 혹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사건이다.

자기네들이 한 약속을 곧바로 통수쳤는데, 어떤 골빈놈들이 정부 말을 믿겠는가? 군부가 정권을 꿀꺽하려는 게 뻔히 보이는데, 그걸 보면서도 '민정이양 하겠지' 라고 생각하는게 이상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는 불법이었다.애초에 12.12도 불법 쿠데타지만

게다가 신군부의 행패는 그걸로 끝도 아니었다. 어찌됐든 최규하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인데 전두환 일당은 그 최규하 대통령의 엉덩이를 발로 뻥 차버리고 그 자리를 자기네들이 차지했다.

북한은 5.18을 기념하는데, 이건 5.18에 북한이 개입했거나 북한을 위한 폭동이었음을 의미한다?[편집]

북한은 4.19 혁명도 기념한다. 증거.설마 4.19도 폭동이라고 지랄하지는 않겠지
당연하지만 북한은 남한의 민주화 운동을 '우리 수령님을 위한 움직임' 등의 지랄맞은 수식어를 붙여가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 뿐이다. 북한 선동에 넘어가는 건 좌빨이나 수꼴이나 똑같구나 ^오^

또한 북한은 효순이 미선이 사건에서 장갑차에 깔려죽은 여중생들을 멋대로 지네 나라 중학교에 명예학생으로 '전입'시키고 졸업증까지 수여한 바 있다. 남한의 정치 비사나 진짜 사고, 아니면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발생한 상처들을 들먹이면서 남한이 저렇게나 문제있는 집단이라고 침소봉대 왜곡질에 정신승리질 하는 건, 특히 남한 민중들이 민주화의 숭고한 가치를 이뤄내기 위해서 독재정권에 맞서 투쟁하는 걸 그 본질은 싹 무시한 채 "남한 민중들이 자기네들 정부 꺼지라고 들고 일어선다" 라는 그 껍데기만 취해서 마구 풍선 불면서 이리저리 말 옮기고 정신승리하는 짓거리는 예로부터 북한의 단골 스킬 중 하나였다. (사족으로 개좆교과학계에 지랄할 때 쓰는 단골 스킬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북한이 얼마나 답이 없는 집단인지와 주체사상이 얼마나 답이 없는 종교인지도 알 수 있을 것.)

지만원의 무죄 판결은 법원도 5.18이 폭동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편집]

2012년 12월 27일 5.18 폭동설을 계속해서 주장한 지만원이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자, 판결문도 안 읽어본 일베충들이 무턱대고 풀발기를 해서 난리가 났다. 그러나 이 판결은 명예훼손의 피해자를 특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무죄가 나온것이지, 5.18이 폭동이라는 걸 인정한 판결이 아니다. 판결문을 보자.


가. 검사는 이 사건 게시물로 인하여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들’과 5.18 민주화운동 당시 사망한 피해자들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공소제기하였는바, 일단 이 사건 게시물에는 직접적으롱 피해자들의 성명 등이 표시되거나 5.18 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등록된 ‘5.18민주유공자들’을 지목하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나, 이 사건 게시물의 공소제기 부분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의 특수군이나 불순분자가 파견되어 광주시민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나아가 그 무렵 그들이나 북한의 대남사업부 전문가 또는 그 후 좌익(성향의 사람들)이 그 살해범의 누명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내 등에 출동하였던 대한민국 군인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자극적인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뜨렸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이 사건 게시물을 읽는 일반 독자들이 현재까지 법원의 판결이나 5.18 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의 제정, 시행과정 등에서 5.18 민주화운동에 관하여 밝혀진 사실과 다르게 5.18 민주화운동의 성격이나 내용을 이해할 여지가 충분하고, 이 경우 그 독자들은 ‘5.18민주화유공자들’이나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광주시민들도 결과적으로 북한의 특수군이나 불순분자 등에 의하여 선동된 폭동에 참여하고 북한의 특수군이나 불순분자의 행동에 협조하거나 동조함으로써 북한의 대남전략전술 내지 공작에 속아 넘어가 대한민국의 국익을 해하는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이라는 인상을 갖게 될 수 있으므로, 비록 앞서 본 바와 같이 이 사건 게시물에는 피해자들을 포함한 ‘5.18민주유공자들’에 관한 명시적인 표현이 없기는 하나 ‘5.18민주유공자들’이나 5.18민주화운동 참가자들 전체의 사회적 평가에 관한 사실이 적시되어 있다고 볼 수는 있다.

 나. 이와 같이 이 사건 게시물이 누군가의 사회적 평가에 관한 사실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피해자들 개개인을 성명 등으로 특정 하거나 적어도 그 표현의 내용을 주위사정과 종합하여 판단할 때 그것이 피해자들 개개인을 지목한 것인가를 알아 차릴 수 있는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고, 다만 피해자들을 포함한 다수인을 포괄하는 범주 내지 그들이 속하는 일정의 범위의 집단을 표시하는 명예훼손인 경우로서, 이른바 집단표시에 의한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볼 것이다. 

그런데 집단표시에 의한 명예훼손은 명예훼손의 내용이 그 집단에 속한 특정인에 대한 것이라는 해석되기 어렵고 집단표시에 의한 비난이 개별구성원에 이르러서는 비난의 정도가 희석되어 구성원의 사회적 평가에 영향을 미칠 정도에 이르지 않으므로 원칙적으로는 구성원 개개인에 대한 명예훼손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 원칙 이고, 다만 예외적으로 구성원 개개인에 대하여 여겨질 정도로 구성된 수가 적거나 표현등 당시의 주위 정황등으로 보아 집단내 개별구성원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때에는 집단 내 개별구성원이 피해자로서 특정된다고 보아야 하며, 그 구체적 기준으로는 집단의 크기, 집단의 성격과 집단내에서의 피해자의 지위등을 들 수 있다. (대법원 2006.5.12.선고 2004다35199판결, 대법원2010.4.15선고 2009다97840판결 등 참조)

 다. 기록에 나타난 증거에 의하여 살피건대, 먼저 사단법인 5.18 민주화운동 부상자회 회장 피해자 신경진의 진술에 의하더라도 5.18 민주화유공자는 4,000명 이상이라는 것이고, 관련단체가 파악하지 못한 5.18 유공자, 나아가 5.18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등에 따른 등록 대상자에 해당하지 않지만 5.18 민주화운동에 참가한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이 사건 게시물에 의한 비난이 5.18 민주화유공자들 개개인에 대한 것으로 여겨질 정도로 구성원의 수가 적다고 할 수 없다. 

또한 기록에 나타난 증거에 의하여 인정되는 다음과 같은 사정, 즉, ① 이 사건 게시물은 피고인이 5.18 민주화운동과 12.12사건 관련 자료들을 수집, 정리, 분석하여 그 결과물을 책자로 발간하기로 하면서 그 머리말의 일부로서 작성한 것이고(공소장에 기재되지는 않았으나 이 사건 게시물의 다른 부분을 살펴보더라도 이 사건 게시물의 전체적인 취지가 그러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피고인은 2008.10.16.경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한 점, ② 4권으로 이루어진 위 책은 피고인이 관련 재판 및 수사기록, 북한에서 제작한 영화 및 기록물, 탈북 군인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기술한 것으로 그 목적이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들을 비난하는 데 있다기 보다는 5.18 민주화운동의 성격을 피고인의 시각 내지 관점에서 다시 평가하는 데 있다고 보이는 점, ③ 5.18 민주화운동은 이미 그 발생 배경과 경과, 계엄군과 광주시민 사이의 교전사태의 발생원인, 경과, 그 밖에 인명피해의 발생원인, 5.18민주유공자들의 지위와 그에 대한 보상, 예우 등에 관하여 법적 및 역사적 평가가 확립된 상태이어서 이 사건 게시물의 내용이 5.18 민주유공자 등의 개개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정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없고 달리 위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할 충분한 증거가 없다.

 라. 그렇다면, 위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때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5조 후단에 의하여 무죄를 선고한다.


 
— 수원지방법원 안양지원 2011. 1. 19 선고 2010고합51 판결문 중 일부발췌

판결문에 서술되어있듯이 집단에 대한 명예훼손이나 모욕은 거의 인정되지 않는다. 이는 강용석이 아나운서 집단모욕으로 기소되었으나 무죄를 선고받은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다' 단락에서는 '5.18에 대한 법적, 역사적 평가가 이미 확립된 상태기 때문에 지만원의 게시물로는 사회적인 평가가 바뀌기 어렵다' 는 말이 있다. 결국, 지만원의 글은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실제로, 5.18에 대해 모욕이나 명예훼손으로 기소당한 사람 중 특정 개인을 지목한 경우에는 처벌받았다. 김대중김일성과 짜고 광주에 북한 특수부대를 보냈다는 글에 대해서는 사자명예훼손으로 유죄를 선고받았다.기사링크 5.18 희생자의 유족 사진을 가지고 '홍어택배' 라는 글을 올린 사람또한 모욕죄로 유죄를 선고받았다.기사링크

폭동이라면서 지들 레퍼런스 정리도 못함[편집]


약 1분부터 보면, 모 보수논객이 김대령 박사라는 사람이 유네스코에 등록된 공식자료를 모두 열람해서 책을 썼다고 주장한다.[26]

국가기록원에서는 5.18 관련자료들을 비공개 처리해뒀다.

근데 막상 유네스코에 등록된 공식자료들 중에는 일반인에게 비공개 처리되어있는 자료가 많다. 해당 서적의 저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미국에 사는 목사다. 박사 학위는 역사와 관련도 없는 철학 박사 학위. 결국, 역사학계에서 저명한 학자가 공식자료를 열람하여 5.18은 폭동이라는 서적을 냈다는 말은 다 구라인 셈이다.참고. 해당 대학은 신학대학으로, 역사학을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는다.

Uprising=폭동?[편집]

5.18 관련 자료들이 유네스코의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유네스코가 여기서 'Uprising' 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Uprising은 사전상으로는 봉기, 혹은 반란, 폭동으로 번역된다. 다른 것은 볼 줄 모르고 유리한것만 콕 찍어서 보는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일베충들이 이 단어를 보고 풀발기해서 '폭동이랑께!' 라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근데 이 'uprising' 이란 단어앞에는 'Democratic' 이 들어가있다. 이 'Democratic' 이란 단어가 앞에 있는 한, '민주화 폭동' 이란 번역은 맞지가 않다. '민주화 항쟁' 정도의 번역이 적절하다.

5.18 민주화 운동은 한국의 민주화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냉전체제를 완화시키고 민주주의를 달성했습니다. 1980년대 이후, 한국의 발자취를 따라하기위한 시도로 다양한 민주주의 운동이 필리핀, 태국, 중국, 베트남에서 일어났습니다.(하략)

원문링크. 실제로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서는 그냥 '민주화 운동' 이라고 설명한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링크
가장 재미있는 건, 지만원과 서석구 등 일부 보수단체 대표가 유네스코 등재에 반대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는 점이다. 그들 주장대로라면, 유네스코에서 'Uprising' 이란 단어까지 써 가면서 '폭동에 대한 자료를 등재' 하는데 왜 보수인사들이 반대했을까?

유네스코 이야기를 할까 하는데 웃긴건 유네스코가 일본의 군함도를 등재시켰다. 그야말로 반인권적 반인륜적 만행들이 자행된 곳을 유네스코르 등재시켰고 정작 3.1운동은 없다. 5.18은 등재해도. 참 웃기다.

광주 폭동설 확산 자체의 문제[편집]

사실 광주 폭동설 자체는 아주 오래된 떡밥이고, 적어도 이를 정사갤일베에서 진지빨고 믿기 전 까지는 별로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당연하지만 별 듣도보도 못한 사이트나 카페에서 지들끼리 모여서 지들끼리 조잘대는데에는 관심을 줄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일례로, 역갤 구석탱이에서 지들끼리 모여앉아 대일본제국 반자이를 외치며 궁시렁대는 일빠들이나 네이버 카페 등지에 모여있는 환빠들은 지들끼리 놀면서수용소 웬만해서는 탈출하지 않고 있고 그 숫자도 쥐좆수준으로 적다.
그러나 광주 폭동설을 유포하고 선동하는 일베충들은 그 숫자부터가 다르다. '일베충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다' 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이다.[27] 이러한 양상은 2008년에 광우병으로 한창 선동을 해 댔던 좌빨들의 좀비같은 행태와 다를 바가 없다. 근거라고 내미는 자료에는 아무런 신뢰성도 없으며, 지랄병이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도 똑같다.

전 인류가 광우병으로 멸망할 기세.jpg

이런 씹소리들은 사전적인 정보가 전혀 없는상태에서 그냥 보면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그래서 선동당하는 이들이 생기는 것이고, 광우병마냥 확산되는 것이다. 결국, 광주 폭동설에 대한 해답은 무작정 처벌하는것이 아니라 역사 교육을 철저하게 시키는 것이다. '난 이과출신이라 국사따위 모름ㅋ' 등의 얘기가 나도는 건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몇몇 5.18 유공자들의 일탈 행위와 5.18 단체의 논란[편집]

광주 민주 유공자 보상금을 수령한 뒤, 영국행 비행기를 타고 런던에서 다시 북한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월북한 윤기권의 존재와 친일발언을 수도 없이 했던 유공자 김완섭과 광주 유공자 친인척 및 광주일고 동창들이 부산 저축은행의 자금을 횡령한 사건 등이 터지면서 5.18에 대한 심리적인 반감도 조성되었다. 광주 민중 항쟁이 진압되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윤기권은 화가로 활동해 왔다. 윤기권의 존재에 대해 광주 단체에서는 금기시하며 되도록 침묵하는 중이다.

윤기권이라는 사람이 월북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뭐 유공자가 된 사람들의 사건 사고는 한두개가 있었는데, 가장 주목을 받은 사람이 바로 현대판 매국노 김완섭인데, 우익 단체들 중에서는 5.18에 대해서 항상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꼭 나온다. 뿐만 아니라 진보들도 매우 혐오 싫어하고 혐오한다. 그야말로 공공의 적이다 유관순을 깡패라고 표현하며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묘사하는둥 그리고 온갖 일제식민지의 만행들은 다 옹호하면서 자신이 유공자를 받았다는 사실에는 자부심을 느끼는 좆쓰레기이다.

사실 친일파도 아닌게 이놈은 아고라라는 곳에서 북괴의 핵도 찬양하면서 한미일 동맹을 비난한 행동하는 거짓말 제조기인데.

즉 다시 말해서 친일파를 위한 변명은 돈을 쳐벌기 위한 변명이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5.18 단체에서도 서훈 박탈을 요구한 적이 있다. 하지만 서훈 박탈은 커녕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5.18 단체 대표의 말에 따르면 이 사람의 박탈 이유가 우리 단체의 이미지 실추라는 것에 이유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 사람의 의문스러운 5.18 운동에 대한 행적들이 하나 하나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표조차도 이 사람의 의문스러운 5.18 가담 행적에 대해서 확인결과 하자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결국 서훈은 계속 유지가 되고 있었다. 정작 폭탄을 제거하고 군인들과 시민들을 구한 사람에 대한 서훈은 박탈했던 것이다. 한간에는 시위를 하다가 군인들한테 끌려가서 열심히 맞고 장티푸스라는 병을 얻었다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상식적으로 참 납득이 되지 않는다. 당시 폭탄을 제거받은 사람이 신군부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서훈을 박탈당하고 다시 회복했다는 점을 봤을때는 너무나도 이해가 안간다.

5.18 단체에게 있어서 김완섭이라는 존재는 소위 종교로 말하면 이단인 셈이다. 어차피 종교도 정치와 뜻을 같이하고 5.18 단체들도 일종에 정치적인 집단인 셈인거다. 참고로 5.18 단체들을 비하했던 지만원 역시 월남참전을 통한 유공자로써 월남참전전우회같은 단체들 입장에서도 썩 반갑고 좋지만은 않으며 소위 종교로 치면 이단과도 같다.

왜 유공자들의 잇단 망언이나 각종 사고들이 불거지는가 하면 일단 저런 유공 단체들의 경우는 나라에서 지정된 유공자이기 때문에 유공자는 곧 성역이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것이 정치적 사안과 연결이 되고 이를 통해서 수 많은 인맥들도 형성이 되는데, 그 과정에서 온갖 망언이라던가 부패와 비리와 같은 불법 행위를 저질러도 유공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쉴드가 되거나 까더라도 흥 일부일 뿐이거든요. 그리고 우리도 싫어하고 저 사람 법적으로 규제하거든요. 그리고 저 사람 공적도 인정해야 하거든요. 너 고소! 이딴 식으로 나가니깐 결국 제대로 된 제어가 쉽지가 않고있다.

예를 들어서 탈북자 단체들도 범죄를 저지르는 탈북자가 몇명 있는데 탈북자 단체들도 항상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 너무 심각한 나머지 탈북자들도 자체 정화를 하는 판국에 이르렀다. 그로 인해서 탈북자들끼리의 분열이 가속화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어차피 겪을 진통일수 밖에 없다. 비온뒤에 땅 굳는다는 말이 있듯

물론 유공자들이 나라에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며,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해야한다. 또한 탈북자들에게 일자리도 주고 탈북자들에 대해서 개념없는 발언을 하는 임모씨 같은 년들도 규탄해야 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누군가 문제가 생기면 일부드립을 치거나 꼬리 자르기식으로 잘라내는건 부패한 금수저들이나 하는 것이다.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이 있다. 방산비리의 경우도 일부의 문제로 해석을 해버리게 된다면 결국 흐지부지되는 것처럼 결론적으로 이것은 저 사람들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 단체들도 아무리 유공자 단체라고 할지라도 자체정화를 나설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갈등과 분열이 엄청나게 일어나지만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이 있듯 잘되기 위한 아픔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 5.18 단체들이 이런 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늘 말하지만 5.18 단체나 월남참전유공자회나 각종 유공자 단체들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패한 정치인들을 비롯한 금수저들과 비슷한 테그를 되지 않기위해서 이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정의승도 월남참전 유공자였는데 열라게 욕먹었고, 월남참전 유공자들 중에서 방산비리에 엮인 유공자들이 생각만큼 여럿된다. 실제로 월남참전 유공자들이 방산업체에 뛰어드는건 흔한 일인데 이는 본래의 직업이 군인이라서 그렇다. 근데 그런다쳐도 보훈정책이 막장이라고 해서 정의승처럼 무기비리까진 좀 심했다..

광주일고 출신 및 일부 광주 유공자들의 부산 저축은행 사건[편집]

광주일고 출신들[28], 일부 광주 민주 유공자의 가족, 친척들 및 그들이 심어놓은 인맥이 부산 저축은행의 자금을 횡령하거나, 다른 목적에 투자했다가 돈을 날렸던 사건 역시 광주에 대한 반감을 부채질했다.[29] 특히 김대중정부, 노무현정부 당시 농림부장관 등 고위층과 인맥을 형성한 광주일고 출신들이 사건을 주도한 것이 드러나면서,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영남지역에서 광주 및 5.18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었다.[30] 부산저축은행의 2대 대주주의 한 사람은 광주 유공자의 형의 처남이었고[31],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은 노동운동가의 오빠이기도 했다.[32] 광주 출신들이 부산 사람의 돈을 작심하고 횡령했다는 말까지도 돌아다녔다.

이때 부산저축은행 공금횡령 및 자금유용의 또다른 주역으로 부산상고 인맥도 가담했음이 확인되었지만 부산상고 인맥만을 강조하면서, 광주일고 출신 및 일부 광주 유공자를 덮어버리려는게 아니냐는 반발도 나타났다. 광주일고 인맥 및 광주 유공자 가족들에 대한 비판이 적자 이를 옹호하는게 아니냐는 반발이 계속되자 급기야는 보수세력의 광주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 사건에도 개눈깔 박지원이는 빠지지 않았다.

여담[편집]

이 사건이 일어난 광주광역시는, 이 사건을 폭동이라고 폄하하는 수꼴들에게 죄다 고소미를 준비하고 있다. 참고로, 이 사건과 연관된 장소를 지나는 버스인 518번 버스도 있다.

참고로 새누리당이 아닌 열린우리당에 있던 이원영 전 의원은 저런 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는데, 트위터에서는 반새누리당 반독재를 외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사람은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 태세전환보소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0&oid=047&aid=0000081310

참고로 mbn 뉴스와이드에 고영신 전 경향신문 출신이 5.18 사건이라는 드립을 치고 전두환 시절 어쩌구 이야기하다가 이후에는 mbn 뉴스와이드에선 모습을 잘보이지 않았다. 위에 뉴스에 나온 장성민 역시 과거에는 5.18 사태라는 말을 했다. 참고로 이 사람은 구 민주당 출신의 현 장성민의 시사탱크 진행자이다.

5.18 시민군 출신인 박남선을 초대해서 5.18 당시 5.18의 상징인 전남도청을 허물지 말고 기념관으로 발전하자는 건 YS도 인정했다. 하지만 역으로 노무현이 문화의 전당 지역을 다른 지역이 아닌 그 전남도청을 헐고 전남도청을 새로 문화의 전당으로 개칭한 덕택에 최운영과 박남선이 같이 노무현과 문재인을 깠고, 5.18로 울궈먹던 친노 강경 세력들에게는 그야말로 멘붕으로 빠트렸다. 뿐만 아니라 시민군 출신인 박남선과 관계자인 최운용이 박근혜 대통령님이라는 말까지 하며 김무성의 조상이 전남방직을 세워 쌀을 나누어줬다고 칭찬을 수두룩했다. 또한 박지원은 5.18때 계엄군을 보낸 것은 영웅적 결단이라고 말하다가 수구보수들은 물론 친노 성향의 양경숙에게 엄청난 욕을 처먹었다. 대단한 사람들이여. 발언들을 보니 어지간한 정부나 여당 인사들보다 더 친 정부같고 더 여당 인사들 같구만. 노리둥절 잼

5.18 시민군 출신들 중에서 사실 몇몇이 저러한 반공주의자들로 변한지 오래이다. 김현장씨도 사실 5.18 유공자이지만 새누리당을 지지했고 열렬한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이런 종편에 출현한 사람들이 저런 발언들을 한 이후에 몇 인터넷 친노들은 "시민군 여러분들 왜 종편에 이용당하시나요." "5.18이 호남의 것이냐? 그렇게 호남 호남 찾으면 뭐 될거같냐?" "호남 정치인들 기득권부터 내려놓아라" 라는 이야기들을 수도 없이 쏟아냈다. 일베애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호남 총리 운운하면서 쉴드친 인간들이 수구꼴통들의 말들을 저따구로 인용하는 노슬람문베충들은 비열함 그 자체다. 과거 야구 갤러리에 와서 야구 기사란에 "전라도"라고 말하고 도발하는 유저들을 욕할 자격도 없다.

사실 5.18 운동의 진정한 영웅은 그 당시 폭탄을 제거했던 배승일씨와 그를 도운 5.18 시민군중 온건파들이었다. 정작 이들은 초야에 뭍혔다. 배승일씨가 폭탄을 제거하지 않았더라면 전남도청을 비롯해 주변에 폭탄이 터져 5.18은 폭동 정도가 아니라 여순반란급으로 규정해도 할말이 없는 행위였고, 김완섭같이 뒤에서 줏어먹는 부류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오히려 5.18운동을 주도했던 온건파들의 경우는 폭력시위보단 평화시위를 요구했고 더 열일한셈인데 정작 그들이 뭍혀버렸다. 애초에 온건파들의 경우는 김대중의 석방과 이런 것보단 오히려 대통령제의 문제점을 삼은 것으로 보여진다.

여러 동네 같이 보기[편집]

자료 보기[편집]

국가에서 직접 조사하여 작성한 보고서 중, 비공개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건 1985년 안기부 조사 보고서, 1995년 검찰 조사 보고서,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보고서 셋이다. 직접 이 자료들을 보고싶다면 아래 링크에서 다운받으면 된다.
링크


  1. 아래에도 서술되는 내용이지만 전두환은 내란죄로 처벌받았기 때문에 전두환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말은 어느정도 맞는 얘기다.
  2. 요즘은 전라도만 써도 욕설로 보인다 카더라
  3. 뭐라해도 싫어하니 전라민국이라 부르면 된다 카더라
  4. 88년 노태우 정부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조사, 김영삼 정부 95년 검찰조사, 특별수사본부의 재조사, 2007년 노무현 정부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5. 가장 재미있는 사실은, 5.18 폭동 떡밥은 역사학계에서 다룰 가치도 없는 것 취급한다는 점이다. 경상도 까는 떡밥으로 종종 쓰이는 '흉노족 신라왕족설' 또한 학계에서 거들떠도 안 본다.
  6.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62쪽.
  7. 5·18 상황일지
  8. 〈전교사 상황일지〉(5·18)에는 ‘7공수대 총검진압’이라고 적혀 있고, 안기부에서 1985년 작성한 자료에도 ‘7공수여단 착검진압’이 명시돼 있다.
  9. 144회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 7쪽
  10. 144회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 7쪽
  11. 144회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 7~8쪽
  12.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70~71쪽
  13. 보안사 505보안부대
  14. 광주사태 사망자 검시결과 보고, 408쪽
  15.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70쪽
  16. 국방부 장관 증언
  17. 5·18 '충정명령'은 무차별진압 작전
  18. 전문링크
  19. 이는 점점 빈번하게 활용되어 '민주화당하다'는 단어로 유행되어 사회이슈가 되기도 하였다. 다만 희화화 된 '민주화'가 최초로 등장한 곳은 디시가 아니라 이글루스이다.
  20. http://magazine.joins.com/economist/article_view.asp?aid=243208 사실 이 에피소드는 홍어보다는 전라도 뒷통수로 더 부각되었다.
  21. 2009년 기아 타이거즈의 우승으로 반홍 정서가 강해진것도 있다.
  22. 세계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 히틀러의 앞잡이로서 기막힌 언론플레이를 선보여 독일 국민들을 세뇌시켰다.
  23. 북한 특수군이 광주에 투입됐다는 주장을 하는 임천용은 그 특수부대의 숫자에 대해 600명이라고 했다가 450명이라고 하는 식으로 말이 계속 바뀐다.
  24. 3.1운동은 폭력을 쓰지 않았다고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운동이 격화되면서 폭력투쟁이 벌어졌다. 참고
  25. 보수주의 성향의 정책 연구소이다. 미국 정부의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26. '역사로서의 5.18' 이란 책으로, 일베충들이 꽤 많이 사서 읽은 모양이다.
  27. SBS '그것이 알고싶다' 에도 일베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28. 대종상조직위에 이규태 부산고 동문 모인 까닭?
  29. ‘광주일고’ 인맥 얽힌 부산저축은행…야권도 ‘뒤숭숭’ 시사저널 2011.02.07
  30. 삼성꿈장학재단, 가시지 않은 삼성과의 독립성 문제
  31. "정치검찰, 부산저축은행 수사도 '친노' 정조준" 오마이뉴스 2012.02.24
  32. [저축은행 비리 커넥션] 전·현정권 넘나들며 얽히고 설킨 ‘광주일고 인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