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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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땅크 부릉부릉
전두환
다진홍어에 탁주한잔 거하게 하고 헤롱거리는 아재
다진홍어에 탁주한잔 거하게 하고 헤롱거리는 아재
대한민국 대한민국제11·12대 대통령
임기 1980년 9월 1일 ~ 1988년 2월 24일
전임: 최규하(제10대)
후임: 노태우(제13대)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출생일 1931년 1월 18일(1931-01-18) (88세)
거주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학력 육군사관학교 학사
별명 전땅크, 전대갈, 전낙지, 전29만원, 땅크보이, 엔젤두환, 전돤[1]
종교 불교
배우자 또한[2] 이순자

대한민국의 제11~12대 대통령. 엔젤두환이라 불린다.

2009년 기아 우승 이후 야갤충들이 엠파커를 까면서 홍어를 땅크로 밀어버리는 짤이 도입되면서 야갤 및 합필갤, 정사갤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땅크성님이라고 빨기 시작한 것도 야갤이 시초. 다만, 일베와는 다르게 디씨의 게시판이 정치적 스펙트럼이 제법 넓기 때문에 언론이나 5.18 단체에서 부들부들하는 경우는 일베보다 적었다.[3]

일베에서도 전두환은 혐오의 대상이었으나 2012년 대선 즈음에 땅크아트[4] 게시물들로 인해 일베 회원들에게 새로운 인상이 심어졌다. 처음에는 "컨셉이지 전두환을 진짜빠냐"는 분위기였으나 팩트를 찾아보니 하기 기술된 제5공화국시절의 경제 업적이 재조명을 받게 되었고, 일베 회원들의 전두환에 대한 이미지가 급반전하게 된다. 마침 그 순간을 노린 시스템클럽 회원들의 난입으로 전두환을 진짜로 빠는 인간들이 늘어났으며, 5.18 북괴개입설 또한 주목을 받게 되었다.

특징[편집]

  • 창씨개명을 안 하고 개겼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땅끄의 싹이 보였다고 할 수 있겠다.
  • 땅크를 좋아한다카더라.
  • 자기 통장에는 항상 29만원밖에 없다 카더라근데 이젠 그것마저 뺏기게 생김

어록[편집]

  • 본인은, 본인은
  • 각하, 군대에도 각하께 충성을 바치는 심복이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5]
  • 광주는... 어... 그거는 총기를 들고 일어나는 하나의 그 폭동이야. 근데 그니까 계엄군이기 때문에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6]
  • 젋은 사람들이 나한테 대해서는 아직 감정이 안좋은가봐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 [7]
  • 부대 열중쉬어
  • 이제 누가 권력을 잡더라도 헌법을 개정해서 장기집권 하겠다 하면... 그렇게 나오는 사람은 간댕이가 큰사람이지 [8]
  • 왜 나만 가지고 그래?
  • 좋아! 아주~좋아!
  • 지금 일이 잘못되면 우린 평생 역사에 씻을수없는 죄인이 되는겁니다
  • ....미친놈!
  • (가슴을 팍치며)됐어! 으하하하하하!
  • 됐어! 나가!

군 경력[편집]

  • 1955년 소위 임관
  • 1956년 경리감 이규동 준장의 전속부관(중위)[13]
  • 1960년 서울대학교 ROTC 훈육장교(대위)
  • 1961년 중령, 전두환은 소령시절 없이[14] 대위에서 바로 중령으로 진급했다.
  • 1972년 베트남 파병부대 연대장(대령)
  • 1976년 청와대경호실 차장보(준장)
  • 1977년 1공수여단장(준장)
  • 1978년 1사단장(소장)
  • 1979년 국군보안사령관(소장)
  • 1980년 중앙정보부 중앙정보부장 서리(중장)
  • 1980년 대장 예편

소싯적[편집]

전두환은 1951년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는데 공업고등학교 출신인 데다가 고등학교도 연합고사가 아닌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한 축구선수[15]로 운동부라서 일자무식이었다. 때문에 영어는 늘 하위권이었고[16] 항상 퇴교당할 위기에 몰렸다. 퇴교당하면 현역병으로 한국전쟁에 끌려가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이 위기들을 어찌어찌해서 잘 넘기고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인 1955년에 소위로 임관했다. 그러나 머리는 돌대가리였지만 리더쉽은 뛰어났던 전두환이라서 그의 휘하에 들어오려고 하는 무리들은 그야말로 바글바글했다. 심지어는 친구이자 육사 동기인 노태우도 전두환의 휘하였다.

전두환은 말년대위 시절에 서울대학교 학군단 훈육장교를 하고 있었다. 이 때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전두환은 갑자기 모교인 육군사관학교로 가서 후배 생도들을 다 끌고 나와서는 예복을 입혀놓고 박정희 지지 퍼레이드를 벌이게 했다. 이에 박정희가 감동먹고는 전두환과 차지철 두 대위한테 정계진출을 권유했다. 차지철은 응해서 김두한과 나란히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전두환은 군대에 남겠다고 했다. 이에 쿠데타가 안터졌으면 그 다음 보직이 직업보도반이었을 전두환은 박정희의 총애 덕분에 소령 계급장은 구경조차 못해보고 대위에서 바로 중령에 진급했다. 육사 출신인데 대위 계급으로 직보반이라면 육사출신은 100% 중령에 진급하는 지금 기준이라면 어이없는 노릇이겠으나 당시에는 갑종장교가 육군사관학교보다 더 잘나가던 시절[17]이었고 실제로도 전두환은 갑종 탈락해서 육사에 들어갔다.

베트남 전쟁[편집]

전두환은 대령때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어 월남파병부대 연대장을 했는데 그야말로 보호관심장교였다.

날이 찌는듯이 더운데도 불구하고 식수와 기름이 부족해서 병럭들은 허덕이는데도 정작 자신은 연대장이라는 직책을 이용해서 온수샤워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했다. 거기에 군공이 전혀 없어서 무기밀매상과 접촉해서 AK-47을 밀수한 뒤 이것을 적에게 노획했다고 구라를 쳐서 상부에 헌납했다.

그런데 이게 구라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베트남에서 전두환 대령의 행보가 완전히 보호관심장교였다는 것이 드러나자 준장 진급에서 누락되었다.

하지만 전두환은 박정희의 총애를 받고 있는 군인인지라 계급은 대령이어도 이후 보직은 준장 보직인 제1공수특전여단장을 받았다. 이후 전두환에 대한 여론이 잠잠해지자 은근슬쩍 준장으로 진급했다.

차지철과의 관계[편집]

전두환은 박정희의 애완인간인 차지철과 같이 박정희의 신임을 받았다. 두 사람은 임관출신은 다르지만 군대 동기였고 둘 다 대위 시절에 박정희의 군사정변에서 공을 세워 나란히 박정희의 최측근이 되었다. 그래서 이 두사람은 서로 충성심경쟁을 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박정희의 훚앙을 빨아야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친한척 하고 의형제 시늉을 했다. 하지만 인적이 드문 곳에 혼자 있게 되면 서로 상대방의 뒷담화를 깠다.

전두환이 차지철을 뒷담화하는 내용[편집]

지철이 고놈자식은 말이지 일자무식인 주제에 계속 말을 끊고 자기말만 해대니 기분나쁘다. 재규 형님이 꼭지가 돌거 같다.


차지철이 전두환을 뒷담화하는 내용[편집]

두환이 고놈자식은 말이지 전혀 남자답지가 못해. 게다가 나이도 몇살 쳐먹지도 않은 녀석이 존나 고리타분해서 도무지 말이 안통한단 말야.


전두환과 차지철이 만났을 때의 대화[편집]

  • 전두환 :

지철이 자네 덕분에 내가 각하께도 총애를 받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가!


  • 차지철 :

두환이 자네가 여러모로 도와주고 신경써서 정말 고맙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을걸세.


늘 이런 식이었다.

업적[편집]

부릉부릉

땅크를 잘다룬다[편집]

부릉부릉

물가안정과 경제성장[편집]

흔히 전두환시기의 경제발전은 3저호황 덕분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3저호황은 전두환 정권 말에야 시작되었고, 전두환 시기는 오히려 유가가 어느 때보다 비싼 시기였다. 70년대말 오일쇼크로 인해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전세계는 치솟는 물가상승에 고민이었다. 2차오일쇼크 당시 한국의 물가상승률은 79년 18.3%, 80년 28.7%, 81년 21.4%로 미친듯이 치솟았다.

경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던 전두환은 경제관료인 김재익[18], 사공일에게 경제전권을 위임시켰다. 좌좀들은 "전두환이 아니고 김재익이 살린거네"라고 전두환의 업적을 부인할수도 있겠지만, 어떤 인재를 기용하여 어떤 위치에 적재적소에 배치할지 결졍하는 용병술은 고평가될 만 하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의 모든 부문을 정부 통제하에 두려고 했기때문에 부작용이 심했고 물가는 오히려 더 뛰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그당시에는 경제성장률을 너무 중요시한 나머지 물가가 폭등하는 와중에도 대기업지원을 위해 통화량 환수에 주저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 시기에는 반대로 중소기업위주의 경제정책으로 전환했고, 통화량을 대폭 축소시켰다. 가격기제도 정부가 마냥 통제할게 아니라 시장경제체제를 이용한 대규모수입을 통한 물량공급으로 해결했다.

81년에 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전두환은 물가안정에 주력했다. 결국 82년의 물가상승률은 전년의 21.4%에 비해 7.2%로 낮아졌다. 그리고 노태우가 집권하기 전인 88년까지 물가상승률은 5%를 넘지 않는 물가안정이 유지되었다.(83년 3.4%, 84년 2.3%, 85년 2.5%, 86년 2.8%, 87년 3.0%)

서민경제 살린 대통령[편집]

KDI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82년부터 지니계수와 상대적 빈곤률은 하강곡선을 그렸다. (이 추세는 92년까지 지속되었으나, 김영삼이 집권한 시기부터는 다시 상승했다.) 80년대의 지니계수

2005년 한국은행에서 발표한 "기업수익구조의 변화와 시사점"이라는 자료에 의하면 80년대의 경제성장률은 8.7%을 기록했고, 개인수익 상승률은 9.9%에 다다랐으나 기업은 6.1%에 그쳤다. 그당시 한 학기 등록금이 70만원이었는데 당시 공사판 임금이 5~8만원이었으니, 열흘 일하면 등록금을 버는 셈이었다.[19]

단위:% / 한국은행, 기업수익구조의 변화와 시사점, 2005.2
1980년대 1990~1996년 2000~2003년
경제성장률 8.7 7.9 5.6
개인 9.9 6.6 0.3
기업 6.4 4.3 62.6

법치 질서 확립[편집]

전두환은 노태우가 했던 범죄와의 전쟁의 원형이 되는 각종 법안을 도입했으며 실제로 이윤상군 유괴사건 당시에는 사건수사에 전두환이 직접 관여함은 물론 사건수사 도중에 형법을 뜯어고치기까지 했다. 이윤상 소년[20]이 유괴당하자 전두환은 방송에 나와서 다음과 같은 대범인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윤상이를 납치한 범인놈아. 좋게 말할 때 집에 돌려보내라. 윤상이가 살아서 집에 귀가한게 확인되면 더 이상 수사를 하지 않겠다. 또한 윤상이를 데리고 파출소로 와서 자수하면 최대한 선처를 해 주겠다. 하지만 윤상이가 살면 범인 너도 살도 윤상이가 죽으면 범인 너도 죽여버릴 것이다. 잘 생각해보고 어떤 게 네놈에게 유리한지 결정해봐라.


그러나 이윤상 소년은 시체로 발견되었고 범인은 이윤상 소년이 다니는 학교의 체육교사인 주영형(당시 30세)[21]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전두환은 직권으로 아동유괴살인은 무조건 사형으로 법을 뜯어고쳐버렸고 보통 사형수가 되면 1년 정도 후에 집행하는데에 비해 전두환은 주영형을 단 열흘만에 사형을 집행시키는 기염을 토해서 아주 본때를 보여줘버렸다. 주영형의 사형이 집행되자 전두환은 또다시 대국민선언을 했다.

국민 여러분, 앞으로 아동 유괴와 관련된 범죄는 무조건 이렇게 다스리겠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주영형의 강요에 의해 범행에 가담한 두 명의 여중생들에게는 각각 징역 2년과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하고 교도소에 쳐넣었다. 주영형을 검거한 경찰관은 그야말로 전두환의 총애를 받아 고속승진한 끝에 청와대 경호실장까지 진급했다.

각종 규제철폐[편집]

통행금지가 해제된 시기도, 두발자유화, 교복자율화가 된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다. 우민정치를 했다는 비판과 연계된다.

독립기념관 건설[편집]

일본이 역사왜곡을 시도하자, 국민성금을 모아 독립기념관을 건설했다. 정작 민주화의 화신이라고 불리는 어떤분은 자기 도서관 짓기에 바빴지...

평화의 댐 건설[편집]

북한이 금강산댐을 폭파해서 남한을 수몰시키려고 하자 이에 맞서서 국민성금을 모아 평화의 댐을 건설했다. 그런데 수고비가 너무 비쌌다.

은 주작질[편집]

200억톤 물폭탄 운운했으나 한때 동양 최대의 댐 소리 듣던 소양강댐의 최대 저수용량이 30억톤이 채 안된다. 대체 1980년대 북한의 기술력이 어느정도이길래 200억톤이나 되는 물을 가둬뒀다가 한꺼번에 방류하는 댐을 만든다는걸까? 임진강에도 비슷하게 북한의 무단방류에 대비한 군남댐이 있으므로 댐건설 자체는 그리 욕먹을짓은 아니라고 할 수 있으나 되도않는 북풍몰이 한답시고 대학 교수들까지 동원해서 주작질하다 사서 욕처먹은 대표적인 예. 물론 뇌가 퇴화된 틀딱들은 북한이 댐을 폭파(?) 시켜서 63빌딩의 절반이 잠기게 하려 했다고 믿고있다. 바로 윗 문단을 쓴 병신이 그 좋은 예인데, 북한이 자기들이 지은 댐을 스스로 폭파한다고 싸제껴놨다. 수공을 하고싶으면 댐의 수문을 열면 끝인데 폭파는 왜 나오는지....

비판[편집]

마법의 지폐

외모[편집]

그는 대머리이다. [22]

낙지처럼 생긴것 같기도 하기 때문에 전낙지라고도 불린다.

연예인 탄압[편집]

배우 故박용식에 대해서는 자신이랑 똑같이 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출연정지를 때려서 방송국 근처에 얼씬거리지조차 못하게 했다. 이 때문에 박용식은 할 수 없이 먹고 살기는 해야겠으니까 자기 집을 개조해서 방앗간을 차려서 목구녕에 풀칠해야만 했고 훗날 이걸로 사업확장을 시도해서 (주)세덴 이라는 자동차용품 중견기업의 회장이 된다.[23] 전두환이 대통령에서 물러난 이후 박용식은 주구장창 전두환 역할만 전담하는 배우가 되었다.

개그맨 故이주일은 단지 못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간첩으로 몰아서 코렁탕을 먹이고 방송출연을 금지시켰다.

이거 어떤 병신이 적은건지 모르겠는데. 이주일씨 생전 인터뷰 보면 술에 취해서 아는 지인을 데리고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네 집에 찾아가자 전두환이 이주일을 집으로 데리고와서 술을 같이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故박용식씨는 전두환 대통령과 닮았다는 이유로 출연 금지를 먹은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방송사에서 한 일이지, 전두환 대통령의 명령으로 한 것이 아니다. 후에 전두환이 故박용식씨를 만나서 그런 일이 있는지 몰랐다고, 청와대에 도와달라고 요청했다면 도와주었을 거라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故박용식씨나, 故이주일씨나, 모두 '머대리' 이기 때문에 방송사의 과잉충성으로 발생한 해프닝이다.

심수봉은 10.26 사태 이후 강도 높은 조사를 받고, 정신병원에도 들어갔다. 1979년에 드라마《순자의 가을》주제곡 OST〈순자의 가을〉을 불렀는데, 순자가 영부인 이름이어서 출연금지 시켰다. 그리고 출연금지 해제되고 1984년 무궁화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시대적 상황이 상황인만큼, '내 뒤를 잘 부탁한다' 같은 가사가 박정희에 대한 추모로 해석되어 국민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또 출연금지 먹었다. 5공 정권은 박정희에 대한 추모가 자신들의 정당성을 저해하는 요소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5공 정권이 고의적이고 집요하게 연예인을 탄압한 사례는 심수봉 이외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1980년 8월 16일부터 '연예인 사회정화운동'이 실시되어 당월 29일까지 이주일, 나훈아, 심수봉, 배삼룡, 이기동 등 24명의 연예인들이 출연금지 조치를 받았지만, 이들 중 20명은 1981년 신정부터 풀렸으며, 나머지 4명도 1980년대 초반경에 풀려났다.

군내 사조직 결성[편집]

군대 안에서 '하나회'로 잘 알려진 사조직을 결성했다. 하나회 회원들의 대부분은 노골적인 인사특혜를 받고 꿀보직에서만 뺑뺑이돌았고, 박정희는 군대에서의 자신의 영향력 유지를 위해 하나회를 옹호했다. 하나회 회원들은 대부분 경상도 사람이었지만, 이 중에 전라도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장세동이었다. 이 때문에 장세동은 은근히 따를 당하는 와중에 전두환이 자신을 감싸주니 12. 12 사태 당시 장태완을 버리고 전두환 편에 붙었다. 이들은 나중에 김영삼에게 싸그리 숙청당한다.

언론장악[편집]

당시 전두한 정권의 언론장악의 대표적인 상징인 일명 땡전뉴스. 9시 땡 치면 전두환을 찬양하는 기사부터 나온다고 해서 땡전뉴스라고 불렸다. 뚜뚜전 뉴스라는 별명도 있었으나 땡전뉴스가 더 어감이 좋아서 땡전뉴스가 된 것 같다. 이걸 보면 북한에서 하고 있는 뉴스랑 별로 다른게 없다. 전두환이 뭐만 했다하면 방송사들이 앞다투어 전두환을 찬양하는 비디오를 보내곤 했다. 뉴스 시작 단골멘트가 "오늘 전두환 대통령 각하 께서는..." 이었기 때문에 전두환의 호가 '오늘' 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뒤에 "또한 이순자 여사는..."라는 말도 빈번하게 나오는 멘트였는지라 이순자의 호는 '또한'이라는 소리도 있다

추징금 미납[편집]

전두환은 2013년 현재 1673억원의 추징금을 미납하였으며, 호화로운 생활과 출처를 알 수 없는 수입 등으로 인해 잦은 비난에 시달리고 있다[24]. 이는 사실상 노무현 대통령이 자살의 결정을 한 뇌물과 동일한 성격의 것이다.

16년동안 29만원밖에 없다고 드립을 치다가, 박근혜정부 들어서 처남 구속, 미납 추징금 환수 수사가 시작되면서 추징금을 자진납부 하려는 분위기를 잡았고 2013년 9월에 장남을 앞세워 대국민 사과를 하고 1천672억 원을 완납한다 카더라.

4.13 호헌조치[편집]

1987년 4월 13일 대통령 전두환이 특별담화에서 밝힌 호헌을 위주로 한 정국운영방침. 이날 담화를 통해 전두환은 「평화적인 정부이양과 서울 올림픽이라는 국가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논의를 지양한다」고 선언, 제5공화국 헌법으로 88년 2월 정부를 이양할 것과 그에 따른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 및 대통령 선거를 연내에 실시할 것, 그리고 개헌논의를 올림픽 뒤로 미룰 것 등을 밝혔다. 이러한 호헌조치에 대한 예상되는 반발과 국내외적 반응를 고려, 전두환은 지방자치제의 임기 내 단계적 실시를 시사했으나, 야당과 재야가 연합하여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고 <6·10국민대회> 및 <6·26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 등을 주도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민주화시위가 폭발했고, 이를 6월 항쟁이라고 부른다. 전두환은 이에 굴복하여 <6·29선언>을 발표, 4·13호헌조치를 철회하고 야당의 직선제 개헌안을 수락했다.

우민정치[편집]

3S (Sex, Sports, Screen)에 입각해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갖지 않게 하려고 문화 투자를 육성한 점이 크다. 업적 항목의 각종 규제 철폐도 이런 정책에 입각한다. 프로야구도 이 때 만들어졌다. 그래서 야빠들은 거진다 수꼴이다. [25]

3S 정책은 그 당시에도 주요 일간지에서 다루는 문제였다. 동아일보 사회부 차장의 칼럼. 그리고 올림픽 개최 또한 일본의 대표 우익정객인 세지마 류조의 조언에서 비롯된 것이다.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에서도 관계자들의 증언과 자세한 정황을 다뤘다.

'무슨 사건이 터지면 덮으려고 하는 정부 음모라는 등' 운운할 수 있는데, 전두환 정권은 진짜로 음모가 횡행하던 때였다. 단순 부부싸움을 '여간첩 남편 납북기도사건'으로 조작한 수지 김 간첩조작사건이 그랬고, 평화의 댐 북한수공설이 그랬다. 하도 주작질이 많다보니 당시 안기부를 비롯하여 정부부처가 벌인 일 중에 국민의 의구심을 사지 않는 일은 없었다. 3S 산업도 이런 음모론과 관련있을지도 모른다. MB OUT이네 뭐네하며 트위터에서 떠드는 애들과, 나름 전문성과 증거까지 갖춘 대형 언론사를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의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는 국민들의 투표로 이루어진 민주주의 정부이지만, 당시 전두환 정부는 명백한 군사정권이었다.

하지만 3S 산업 자체는 무슨 사건이 터지면 덮으려고 하는 정부의 음모라는 등 개소리를 일컫는 좌좀들의 대표적인 소설이라 할 수도 있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문화 여가 생활의 발전은 불가피한 법인데, 이런 돈 되는 사업에 투자한 것이 삐딱하게 해석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문화와 경제의 발전은 시민들로 하여금 음모론에 심취하게 만들어 더욱 더 정치에 관심을 쏟게 만들었다. 어쨌건 지금은 군사정권이 없어지고 야구산업이나 영화 등의 재밌는건 남았으니 형편은 더 나아진 것 아닐까? 둘 중 뭘로 생각할지는 알아서 생각해라.


별개로 전두환은 이 야구산업 발전이 훗날 21세기 인터넷 악의 축(?) 야갤을 발생시킬 거라는걸 전혀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전두환의 본의아닌 또다른 만행

5·18 광주 민주화 운동[편집]

지하철 노인 무임승차[편집]

1980년 70세 이상 노인에게 지하철 탑승요금 50% 할인을 제공하다가 1982년 65세 이상 50% 할인, 다시 1984년에 65세 이상 고령자와 국가유공자 완전 무료로 확대되었다.[26] 도시철도공사 측에선 위에서 까라니 까는 거고 정부 지원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푼도 없는 통에 본격적인 고령화 사회가 된 지금은 어르신들 무임승차로 인한 손실이 지하철 운영적자의 50~70%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좀 다른 평가[편집]

전두환에 대한 정치적인 평가는 군사반란을 통해 정권을 찬탈한 독재자라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전두환 개인의 사람 보는 능력이나 부하들 부리는 능력은 좋았다는 평이 있다. 우선 그가 정권을 잡을 수 있도록 전방의 병력까지 무단으로 동원해가며 함께 반란을 일으킨 하나회 멤버들(노태우, 정호용, 황영시, 유학성, 장세동 등)부터 시작해서 경제성장의 방향을 제시한 청와대 경제수석 김재익[27], 김대중 사면 문제와 일본과의 경제차관 문제를 해결한 외무부 장관(이후 안기부장이 되었다) 노신영 등이 그렇다. 역대 대통령들은 사람보는 눈이 없거나 아랫사람 관리를 제대로 못 하여 사건이 터지는 일이 많았는데[28] , 전두환의 경우 요직마다 인재를 등용하여 문제가 거의 없었다는 평이다.

잘 모르는 일에 나대지 않고 적절한 전문가에게 알맞은 일을 맞긴 것이 전두환의 리더쉽의 핵심이라 할 수 있겠다. 심지어 김재익을 경제수석의 자리에 앉히면서 스스로를 굽혔을 정도로 자신의 '무능함'과 다른 이의 '유능함'을 인정했다. 이 부분은 본인 이미지와 안 맞게 쓸데없이 민주적이고 공정했다. 오히려 '민주화'된 이후에 자격없는 사람낙하산으로 앉히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물론 당연히 다른 부분에서는 민주와 자유 같은거 따위 모조리 땅크로 밀어버렸다.

는 개소리[편집]

전두환의 인사 관리에 문제가 거의 없다는 건 완벽한 개소리다. 전두환은 김재익같은 일부 예외를 제하면 주요 요직을 거의 대부분 전문가가 아닌 하나회 출신의 자기 인맥들로 꽉꽉 채워넣었다. 당연히 인맥과 빽으로만 올라온 똥별 출신의 돌대가리들이 행정을 제대로 할 수 있을리는 만무했고, 대통령 본인부터 시작해서 밑대가리들까지 경상도 특유의 지들끼리 헤쳐먹는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부정축재를 일삼았다. 덕분에 제5공화국은 건국 이래 부정부패가 가장 심했던 시기로 평가받는다. 이 시기에 터진 세기의 초대형 금융사건인 장영자 사건과 나라에서 대통령 각하의 비자금을 만들어 주기위해 애새끼들 코묻은 돈까지 강탈해간 평화의 댐만 봐도 전두환 집권기의 부정부패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이었는지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문재인과 더불어 역사상 최악의 측근 콩라인이리고 불리는 박지원의 탄생이 바로 전머갈 덕택이었다. 실제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측근은 문재인이나 박지원이 아니라 곽영주이다. 곽영주는 자기 주인인 이승만을 역사속에서의 평가를 쓰레기로 만든 놈이다.

제발 난독 자제좀[편집]

구스위키 병신들은 좌파낙인 우파낙인 돌려가면서 찍는것이 특기랑께
윗 문단의 요지는 전두환이 인사관리를 객관적으로 잘했다는게 아니라, 자기 개인에게 충성하는 예스맨을 판별하는 능력이 있었다는 것일 뿐 전두환을 미화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어찌되었든 그가 반란으로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근원은 그에게 충성하는 하나회라는 사조직이었고, 그가 무사히 퇴임할 수 있도록 노태우라는 다리를 놔 준것도 하나회기때문이다. 전두환은 완전히 궁지에 몰렸을때도 장세동이 그를 배신하지 않았지만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었고 이명박은 정두언과 김희중이 뒷통수를 후려갈겨서 감옥에 들어갔으며 박근혜 또한 최측근이었던 김무성, 유승민 등에게 탄핵을 당했다. 그저 지 의견과 다르면 우파의견이라하네

재평가[편집]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전두환이 적어도 박정희라는 개쓰레기 씨팔 좆매국노 새끼보다는 훨씬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박정희가 전두환보다 훌륭한 것 따위는 일절 없다. 다음은 전두환이 박정희보다 훌륭한 점이다. 박정희 보다 훌륭한 것이지 전두환이 좋은 사람이라는 얘기는 아니니 난독하지 말것.

  • 물러날 때를 알고 제때 물러났다. 박정희 그 백남의뒈진 새끼는 평생 황제질 해쳐먹으려고 유신헌법을 지조때로 개정했다가 부마항쟁 쳐맞고 김재규의 정의의 응징을 당했지만 전두환은 딱 7년만 하고 지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왔다.
  • 국민의 등을 쳐먹진 않았다. 박정희가 경제개발비이니 뭐니해서 노동자들의 돈을 등쳐먹었지만 전두환은 노동자 급여에는 손대지 않았다. 평화의 댐 모금과 정부 예산에 손을 댔을 뿐. 적어도 평화의 댐 모금은 내기 싫으면 안 내도 된다는 점에서 강제징수한 경제개발비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길 강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전두환은 땡전뉴스로 자기 스스로를 연예인 대통령으로 만들었을 뿐 전국에 자기 동상이나 쳐 만드는 미친 박정희새끼같은 병신격화는 하지 않았다.
  • 세습시도를 안했다. 전두환은 지 혼자만 딱 하고 딱 물러났다. 박정희 씹새끼마냥 아들 박지만 씹새끼새끼에게 강제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시키는 등 대통령자리를 세습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다.
    • 이 부분은 애매한것이 자기 친족은 아니지만 절친인 노태우에게 바지사장 대통령을 시키고 자신이 실세가 되기위해 헌법개정때 국정에 개입할 수 있는 국가원로자문회의 설치 조항을 슬그머니 끼워넣고 퇴임 후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이 되었으나 동생 전경환의 비리혐의를 언론에서 수없이 터뜨려대서 국민여론에 못이겨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을 사퇴했다. 이후 국가원로자문회의법이 완전히 폐지되었고 헌법에 명시만 되어있을 뿐 어떤 대통령도 설치를 하지않은 사문화된 조항이 되었다.
  • 아내를 함부로 버리지도 않았다. 전두환은 지상 최고의 악처인 이순자를 데리고 백년해로했다. 박정희 씨팔놈은 조강지처 김호남을 버리고 이현란과 두집살림을 차렸다가 이현란이 그걸 알자마자 박정희를 버렸고 그 이후 김호남과 이혼하고 육영수와 결혼했다.
  • 어쨋든 본인 하나만으로 끝냈다. 전두환은 지 혼자만 똥을 싸고 끝났으나 박정희 그 미친새끼는 지 딸년 박근혜 미친새끼새끼까지 같이 똥을 싸게 했다.
  • 그의 사전에 토사구팽이란 없다. 적어도 전두환은 자기 따까리와 운명을 함께했다. 박정희 그 백남의뒤진 새끼는 그렇게 믿고 따르던 김형욱을 도축했고 충신 김재규를 멀리하고 간신 차지철을 가까이했고 심지어는 자신이 모셔야 할 장도영마저 토사구팽했다. 반면 전두환은 자기를 끝까지 따라준 박희도에게 육군참모총장을 줬고 평생 친구인 노태우에게는 자신의 다음 대통령을 줬다.

이렇듯 전두환은 모든 면에서 박정희보다는 훌륭한 사람이다. 심지어 얼굴도 전두환이 박정희보다 훨씬 미남이고 키도 전두환이 박정희보다 더 크고 완벽한 무능아 새끼가 줄만 잘타는 박정희 그 똥새끼와는 달리 적어도 축구선수 출신인 전두환은 싸움실력 하나만이라도 좋았다.

기타[편집]

  • 제2연평해전이 벌어지고 윤영하 대위가 전사했을 때 그들의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 정작 민주화의 화신이라고 불리는 어떤분은 이때 월드컵이라고 브라질과 나치의 경기를 관전하러 요코하마로 떠났지... 그리고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연평해전 전사자 묘소를 참배하지 않았다.

가족[편집]

  • 아내: 지상 최악의 추녀 말죽거리 빨간바지 이순자
  • 아들: 전재국
  • 손녀 전수현
  • 아들: 전재용
  • 며느리: 박상아, 전재용의 아내, 탤런트
  • 아들: 전재만
  • 딸: 전효선

관련문서[편집]


  1. 전두환의 이름을 빠르게 부르면 저렇게 된다.
  2. 호이다
  3. 지금은 정사갤이나 야갤에서 사건이 터져도 대충 일베충의 소행으로 묻어간다.
  4. SBS 인터뷰,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나는..." 짤방을 난립하여 비디오 아트처럼 만든 게시물이다[1]. 백남준 비디오아트의 패러디인데, 후에 이 인터뷰 발언을 음원화하여 하여 일베내의 땅크상스와 함께 MC무현의 토대가 된다[2].
  5. 5.16 군사정변 직후 박정희가 전두환을 정계에 진출시키려고 하자 전두환이 이를 거절하면서 한 말이다.
  6. "없잖아?" 라고 끝나는 줄 아는 사람이 많다.
  7. 이것만 봐도 전두환이 얼마나 유머감각이 뛰어난지 알 수 있다.
  8.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 바로 전에 한 말이다.
  9. 이것만 봐도 전땅끄가 얼마나 유머감각이 뛰어난지 알 수 있다.2
  10. 수천억대의 추징금을 판결받자 "지금 당장 내 지갑에 29만원 밖에 없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24017
  11. 뉴데일리는 믿을게 못된다 그러면 추징금이나 빨리 내든지
  12. 본인 명의로는 진짜로 29만원밖에 없는 거 맞아. 문제는 자기 돈을 죄다 며느리의 명의로 해놨다는 거지.
  13. 이순자가 이규동의 딸인데 이때 전두환을 처음 만났다. 이순자는 이화여자대학교 의예과에 재학중이었으나 학교를 때려치우고 전두환에게 시집갔다.
  14. 세계적으로도 이렇게 진급하는 군인들이 가끔 있다. 러시아우주비행사이자 인류 역사상 최초로 지구 밖에 나갔다 온 사람인 유리 가가린 역시 소련군 현역 공군 중위의 신분으로 우주에 다녀왔는데 출발할때 소련 정부에서는 가가린을 순직으로 처리한 뒤 2계급 특진시켜 놓았는데 가가린이 무사히 살아서 지구로 귀환하자 소령 계급을 그대로 인정받고 또 중령도 건너뛰고 바로 대령을 달았다. 그리고 사망 후 소장(대한민국 국군으로 따지면 준장)에 추서되었다.
  15. 전두환은 골키퍼였다.
  16. 영어 전체 1등이라 임관하고 나서 육군대학 영어교관 보직을 받은 노태우와는 대조되는 대목이다.
  17. 갑종장교가 한국전쟁 참전용사 끗발로 어마무지하게 잘나갔었다. 반면 육사는 전두환이 11기였을 정도인데 그나마도 전두환이 4년제 1기였고 그 이전 기수는 죄다 고졸들이었다.
  18. 전두환은 개인적으로 김재익을 매우 좋아했다고 알려졌으며, 부패가 많았던 그 당시에도 청렴했다고 전해진다. 후일 김영삼이 깜짝쇼 폭탄을 터뜨리는 금융실명제도 초안은 김재익이 내놓았지만 전두환에게 아부하는 무리의 방해로 빠꾸먹었다.
  19. 반면 2000년에서 2003년에 와서는 개인수익 상승률은 0.3%에 그쳤으나 기업의 수익상승률은 무려 62.6%을 찍었다. 이 시기 대통령을 지낸 사람은 서민북한 살리기 운운하던 김대중노무현이다.
  20. 사건 당시 중학생이었는데 어렸을 적에 소아마비를 앓은 적이 있어서 절름발이였다.
  21. 서울대학교 ROTC출신에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까지 취득했던 당대 기준으로 엄청난 엘리트였으나 도박에 빠져 패가망신당하고 1천만원(당시의 1천만원이면 집 한채 값이었다.)의 빚을 지자 여제자 2명과 같이 이윤상을 납치했다. 이윤상은 절름발이였기 때문에 쉽게 잡혔다. 이외에도 주영형은 유부남에 슬하에 자녀가 2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0여명의 여제자들과 불륜관계를 맺었는데 그 중 가장 만만한 2명을 범행에 가담시켰다.
  22. 이것만 봐도 전대갈, 전낙지가 얼마나 답이 없는 색히인지 알 수 있다. (?)
  23. 박용식이 살아생전에는 박용식이 회장이었으나 박용식이 죽은 후 (주)세덴 회장 자리가 한동안 공석이었다가 현재는 개그맨 엄용수가 (주)세덴의 회장을 하고 있다.
  2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1240600015&code=940202
  25. 프로야구 뿐 아니라 K리그 (수퍼리그) 또한 이 때 만들어졌다. 전두환은 축구광이었으나, MBC의 의지가 하도 확고한데다 축구 프로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야구를 먼저 프로화시켰다 카더라.
  26. 1984년 당시 이 제도를 적극적으로 건의한 대한노인회의 회장이 전두환의 빙부였다. 이것만 봐도 전낙지가 얼마나 답이없는 색히인지 알 수 있다4.
  27. 미얀마 아웅산 묘소 테러사건으로 순직하였다. 이 사람은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부터 개인 가정교사 수준이었으며, 순직하게 되었을때도 전두환이 매우 슬퍼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오래 살았다면 한국 경제의 구조를 바꿨을지도 모른다는 평가가 많다.
  28. 대표적으로 이승만의 부하인 곽영주는 이승만의 빽을 믿고 온갖 못된 짓을 저질러서 이승만을 그야말로 씨발새끼로 만들었고 박정희는 부하인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었으며, 노태우는 총선에서 패하자 타개책으로 김영삼과 손을 잡았지만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통수를 쳤고, 김영삼은 아들 관리를 제대로 못 해서 IMF와 함께 평생 욕을 먹게 되었다. 노무현은 비서실장으로 임명한 변양균이 학력위조자 신정아와 불륜을 저질러 온갖욕을 다 먹었으며, 문재인의 무차별 사면짓으로 욕이란 욕은 다 처먹었고 이명박은 형제인 이상득의 공천 문제로 보수를 분열로 만들고 박근혜는 윤창중 성추행 사건으로 정국이 뒤흔들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