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두앵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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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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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 4세(Baudouin IV)는 예루살렘 왕국의 6대 국왕이다.

어린 시절[편집]

보두앵 4세는 예루살렘의 국왕 아모리 1세과 쿠르트네의 아녜스 사이에서 나온 자식으로, 그의 위에는 누이인 시빌라 공주가 있었다. 아녜스와 아모리는 추후 귀족들의 반발로 인하여 이혼했지만 시빌라 공주와 보두앵 4세의 왕위계승권은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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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이 9살이 되던 해 그가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던중, 장난을 치다 서로 다치게 되었고 다른아이들은 고통을 호소하였으나 보두앵만이 고통을 호소하지않자 그의 가정교사였던 티레(티루스)의 기욤은 그에게 고통을 느끼지 못하냐고 물어보았고, 기욤은 즉시 의사에게 보두앵을 데려갔다. 보두앵을 진찰한 의사는 보두앵이 한센병(나병)에 걸렸으며 이미 치료하기는 불가능한 지경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 후 1174년 아모리 1세가 죽음에 따라 보두앵은 13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보두앵은 직접 나라를 다스리기 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고, 명장 살라흐 앗 딘 이븐 유수프 아이유브의 힘 아래에 시리아와 이집트 일대의 이슬람 세력이 규합을 하고있었다. 이에 티베리아스의 영주이자 보두앵의 혈육인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 그리고 플랑시의 밀이 함께 섭정으로써 통치하였다.

보두앵 4세의 통치[편집]

2w1z8t5.png 보두앵 4세가 즉위한지 2년후, 레몽 3세의 섭정은 끝이났다. 보두앵 4세는 비록 병에 걸린 몸이였으나 나라를 지키는 것에는 투철하였으며 매우 용맹하였다.

보두앵이 통치를 시작하자마자 제일 첫번째로 한 일은, 자신의 어머니인 쿠르트네의 아녜스를 멀리 내보내는 것이였다. 유럽과 십자군 국가에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왕 대신 모후가 섭정으로써 권력을 남용하는 것 때문에 나라가 몰락하는 것을 본 보두앵의 조치였다.

이슬람 세력의 수장인 살라흐 앗 딘 이븐 유수프 아이유브와는 서로 적이였으나 서로에 대해 존중을 하던 사이였다. 유수프는 '적이지만 훌륭한 왕'이라며 높이 평가했고, 보두앵 4세는 종교와 인종에 따라 백성을 탄압하지 않았다.[1] 본디 십자군들이 세운 예루살렘 왕국이기에 '이교도'였던 이슬람 세력과 끊임없이 충돌했지만 보호를 요청하는 이슬람 세력을 보호해주며 그들의 종교관도 이해해주었고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해주었다. 또한 왕으로써 이유없는 폭정과 탄압, 겉으로만 번드레한 허례허식을 없애려 노력하였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항상 전투의 최전방에서 나병에 걸린 몸을 이끌고 직접 싸웠다.

살라흐 앗 딘 이븐 유수프 아이유브는 예루살렘 왕국의 아스칼론을 공격하기 위하여 3만의 군을 이끌고 카이로에서 북상중이였다. 이를 알아챈 보두앵은 군사를 이끌고 아스칼론으로 갔으나 살라흐 앗 딘은 이를 간파하여 역으로 보두앵을 아스칼론에 가둔채 포위하기에 이른다. 이때 보두앵 4세는 압도적인 적의 숫자에게 포위당하자 말에서 내려 예수 그리스도가 못박혀 죽었다는 성물, 성십자가에 눈물을 흘리고 무릎을 꿇으며 기도를 올렸고, 어린 왕의 용맹함과 그런 행동에 감동을 받은 휘하의 병사들은 죽을 각오로 항전할것을 각오했다.

그리고 보두앵 4세는 아스칼론 요새의 문을 열고 기사 580명과 한 덩어리로 뭉쳐 살라흐 앗 딘의 군대에 돌격했다. 숫자가 적었으나 중세의 기사라는 계급은 무력을 영주와 왕에게 빌려주는 대신 돈이나 봉토를 하사받았으므로, 어릴때부터 죽을때까지 무술을 연마하는것을 중요시 했거니와 살라흐 앗 딘의 기병들은 유럽식의 무장을 한 기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벼운 경무장이였고 이러한 중무장한 기사들의 돌격은 현대의 전차의 파괴력과 마찬가지였다.

이에 당황한 살라흐 앗 딘은 낙타를 타고 재빨리 탈출했고 이에 살라흐 앗 딘의 3만 군대중 2만 7천여명이 피해를 입었다. 세력이 크게 꺾인 살라흐 앗 딘은 예루살렘 왕국에 대항할 군세가 사라지고 전쟁은 소강상태에 이르게된다. 그리고 이은 1179년 보두앵은 여러 봉신들과 성당 기사단장 생 아망의 외드, 그리고 친애하는 기사인 토롱의 옹프루아 2세와 함께 전투에 나서나 선두에 있던 보두앵이 이슬람군에게 포위당하고 이 때 옹프루아가 몸을 던져 대신 칼에 맞아 중상을 입고 죽게된다. 분노한 보두앵은 트리폴리의 레몽, 성당 기사단, 성 요한 기사단을 이끌고 깊숙히 파고들었으나 보두앵의 말이 공격당해 낙마해버리고 만다. 이때 나병의 병세가 심각하여 쓰러진 채로 움직일 수 없었으나 예루살렘 왕국의 병사 하나가 목숨을 걸고 왕을 등에 업고 탈출한다. 그러나 레몽과 보두앵을 제외한 다른 봉신들은 살라딘에 사로잡혀 감옥에 갇혔고 살라딘과 보두앵 간의 협상으로 석방되기로 하였으나 성당 기사단장 생 아망의 외드는 명예를 위해 그곳에 남기로 하여 그곳에서 사망한다. 이후 살라딘은 다른 세력과의 싸움과 보두앵의 기지로 군세가 꺾인 탓에 휴전협정을 체결한다.


"Je ne veux point autoriser par mon exemple la lâcheté de mes religieux qui se laisseraient prendre dans l'espoir d'être rachetés. Un templier doit vaincre ou mourir, et ne peut donner pour sa rançon que son poignard et sa ceinture"

 
— Eudes de Saint-Amand

문둥이왕의 인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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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 4세는 나병에 걸려 점차적으로 몸이 망가져갔다, 시력이라고 예외는 아니였다. 점점 자람에따라 미소년이라는 평을 들었던 보두앵의 피부는 문드러지기 시작했고 이에 고대 로마시대의 가면을 본딴 은가면을 착용하기로 했다.

나병은 본디 전염성이 있는 전염병이였다. 그러나 그의 가신들과 기사들,백성들 중 병이 옮아 산채로 썩어가는게 두려워 보두앵 4세를 대하기를 꺼려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리고 나날이 산채로 썩어가는 왕이였으나 그의 훌륭한 통치와 더불어 전장에서 병사들보다 맨 앞에서서 함께 돌격하며, 몸이 움직이지 않아도 안장에 몸을 매단체 함께 싸우는 모습에 감동을 받은 예루살렘의 모든 이들은 어린 왕의 말을 항상 진지하게 귀기울여 들었다. 보두앵 4세 휘하에 있지않은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전우들' 기사단과 '성 요한의 예루살렘과 로도스와 말타의 주권 군사 병원' 기사단도 항상 어린 왕을 따랐다.

뤼지냥의 기와 보두앵 4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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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보두앵 4세는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일찌감치 자각하고 있었으나 예루살렘 왕국은 항시 군사가 부족하였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슬람세력과의 무조건적인 적대관계가 아닌 조화를 택했다. 허나 유럽의 제후,성직자와 유럽에서 온 기사들은 이교도를 죽여야한다며 전쟁을 원했으나 그들이 전쟁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바로 위에 위치한 로마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보두앵 4세는 자신의 사후 왕국을 지켜나갈 인재를 누이 시빌라 공주와 결혼시키려 했고 아스칼론의 기욤과 결혼시킨후 시빌라는 보두앵 5세를 낳았으나 아스칼론의 기욤은 얼마 못가 죽어버리고 만다.

때마침 프랑스에서 사자심왕 리처드의 심기를 거스르고 쫒겨난 뤼지냥의 기가 중동에 와있었고 그의 외모에 반한 시빌라 공주는 결혼을 원했고 보두앵 4세도 뤼지냥의 기가 프랑스 왕의 봉신이라는 점에 프랑스의 지원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결혼을 성사시켰다.

허나 뤼지냥의 기는 얼굴이 잘생겼다는 이점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무능한 기사였다. 일례로 이슬람 세력의 공격이 시작되었을때 포위당한 뤼지냥의 기를 구하러 보두앵 4세가 직접 출정하여 격퇴하였고 보두앵 4세는 이 기회에 빨리 적을 추격해야 한다고 했으나 뤼지냥의 기는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고 요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이외에도 보두앵 4세가 섭정을 맡겼으나 샤티용의 르노와 함께 이슬람 세력에 대한 학살과 약탈을 일삼자 분노한 보두앵 4세는 뤼지냥의 기의 권한을 모두 박탈하였다.

그리고 보두앵 4세는 시빌라와의 혼인을 무효화 하려했으나 이에 반발한 기는 시빌라를 데리고 자신의 영지인 아스칼론으로 도망갔으며 보두앵 4세에게 보호를 요청한 아랍인을 학살하기까지 했다.

샤티용의 르노와 보두앵 4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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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노의 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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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티용의 르노라는 인물은 귀족이였으나 입지가 좋지 않은편인, 잘 알려지지 않은 기사이다. 르노는 원래부터 기이한 행동을 했었는데, 안티오크의 주교를 묶어두고 협박하거나, 로마 제국이 마음에 안든다며 스스로가 로마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하거나 하는 기행을 벌였다. 당연히 로마의 황제는 대군을 이끌고 직접 르노를 보러왔고 르노는 항복하며 로마 가톨릭이 아닌 그리스 정교로 개종하는것으로 황제를 달랬다.

이후 17년동안 이슬람세력에게 포로생활을 하며 이슬람 세력에 대한 증오는 극에 달했고 기의 지지를 받으며 자신의 영지인 케락(알 카라크)에서 이슬람 세력을 잡아들인 후 성채에서 떨어트려 학대하거나 민간인과 상단을 약탈하는 등 보두앵의 정책과 살라흐 앗 딘과의 휴전협정을 어기고 범죄를 저질렀다. 이에 살라흐 앗 딘은 군을 소집하고 보두앵 4세에게 르노를 처벌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르노는 왕의 명령을 듣지 않았고 독립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는 탓에 보두앵 4세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럼에도 그는 살라흐 앗 딘에게 평화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전쟁이 재개되었다. 몇 번의 작은 전투가 간헐적으로 일어났고 다시 보두앵 4세와 살라흐 앗 딘의 평화는 찾아왔다.

보두앵 4세의 죽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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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노가 케락에서의 만행으로 살라흐 앗 딘 에게 죽을위기에 처했을때, 보두앵은 평화를 지속하기 위해 여느때와 다름없이 자기가 앞장서서 군을 이끌고 달려갔다. 하지만 나병에 걸린 몸으로 직접 대군을 이끌며 사막을 횡단한 보두앵은 결국 1185년 3월 16일 아크레에서 24살의 젊은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의 죽음 이후 예루살렘 왕국과 십자군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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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편집]

이 항목에 쓰인 간지나는 가면짤들은 리들리 스콧의 2005년작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나온 장면들이다. 보두앵 4세를 연기한 사람은 에드워드 노턴.


  1. 이슬람 세력도 예루살렘 일대를 점령했을 때, 종교세를 내면 기독교도를 2등급 국민으로 분류하는 식으로 나름 그곳에서 살게 했으나, 이슬람 평민만도 못한 삶을 살아야 했으며 종교세가 가벼운 금액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