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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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여담으로 오카모토 미노루가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이 아니냐는 뻘소리가 있는데 이는 반박정희 성향의 재미 언론인 문명자가 내놓은 유명한 낭설로 오카모토 미노루는 박정희와 전혀 관계없는 다른 사람이다. 만약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라면 박정희는 갓난쟁이때부터 일본 경찰에 복무하고 아홉살에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진압하고 축지법과 분신술로 구미에서 교사를 하면서 동시에 만주를 오가며 독립군까지 토벌한 말그대로 반인반신이 된다.</ref>[1]
朴正熙
최근에는 나이트에서 일하는 것 같다.
최근에는 나이트에서 일하는 것 같다.
대한민국 대한민국제5~9대 대통령
임기 1963년 12월 17일 ~ 1979년 10월 26일
전임: 윤보선(제4대)
후임: 최규하(제10대)

출생일 1917년 11월 14일(1917-11-14)
출생지 경상민국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
사망일 1979년 10월 26일
사망지 서울특별시 궁정동 안가
학력 대구사범학교, 신경군관학교
별명 호는 중수, 또는 시산, 일본이름 다카키 마사오[2]
배우자 김호남(1934 ~ 1948), 육영수(1950 ~ 1974)
부모 박성빈, 백남의

대한민국의 5~9대 대통령. 쿠데타로 대통령이 되어 장기 집권하면서 한국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기 위한 인프라를 거의 대부분 구축해낸 뒤 박씨왕조를 세우려다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지 못한 죄로 김재규한테 암살당했다 .[3]원조 두부외상 수꼴이 매우 좋아하고 좌빨이 매우 싫어하는 대통령. [4]

평가[편집]

보통 공도 있고 과도 있는 대통령으로 평가된다. 공은 최빈국이였던 나라를 선진국 반열로 이끈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아볼수 없었던 초고속 경제성장이고 과는 독재정치와 개헌, 사법살인등으로 민주주의를 탄압했다는 것이다. 보통 수꼴은 공을 우선시하고 좌빨은 과를 우선시 한다고 카더라.

박정희에 대해 보편적인 견해는 "경제성장의 영웅이자, 종신집권을 꿈꾼 독재자"일부 통베충들은 81년에 사임할거라고 했다 카더라. 아니 그럴거면 78년 선거는 왜했는지?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그를 평가하기를 즐기는데, 우선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위에 설명했듯 영웅적인 성과를 낸 것고 맞다. 그러나 오일쇼크와 국제정세 불안을 겪고도 중화학공업에 대한 시설투자를 무차별적으로 확장하면서 말년에는 좀 문제가 있었기도 했다. 사실상 이 부분빼면 분배측면, 생산측면, 거시경제측면 모두에서 기적적인 성과를 냈다고 말할 수 있다.

흔히 아시아의 4대 용이나 중국과 일본에 비교해 박정희를 존나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중국의 경우는 아편전쟁 이후 서양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면서부터 신해혁명 때에 본격적으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시작하며 영국 자본과 프랑스 자본이 있는 상태여서 당시부터 세계 3위의 GDP를 가진 초선진국, 초강대국 국가였고, 이 당시 중국은 초강대국은 아니였다. 초선진국은 더더욱 아니고 그리고 4대용은 중화민국(대만)이다 경제대국 이였고, 싱가폴은 지금도 준 독재체제고 인구도 적다. 또한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미국 자본과 중국 자본에 종속되어 이미 2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세계 5위의 GDP를 가졌으니 한국과 비교하는 건 어폐가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자원도, 인구도, 영토도, 자본량도 없이 '악으로 깡으로' 이뤄낸 것은 박정희와 그 시대 국민들의 큰 공이라 할 수 있겠다.물론 재규어의 칼타이밍 공공칠빵도 포함이다

그러나 정치에 대해선 아무리 봐도 이 인간이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했나? 싶을 정도로 독재를 위해 힘쓰신 흔적이 역력한데, 이에 대해선 72년 유신 선포 이전의 3공화국과 그 이후의 4공화국을 분리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뭐 이리 변호하냐고? 실제로 3공화국 시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semi-democracy상태였으며 민주주의 지수도 높아지고 있었으니까 그런 거다. 혹시 그 사이트가 통구이식 사이트가 아니냐고? 4공화국 시기는 북한과 거의 동급의 민주주의지수로 평가받는데 그게 통구이일 리가 없잖아?

4공화국 시기는 확실히 박씨왕조 건설을 위해 노력했다 볼 수 있다. 가장 엽기적인 걸 말해주자면, 국회의원을 선거구별로 2명씩 뽑는 제도를 채택했는데(이를 중선거구제라 하는데 다수의 당이 경쟁중일 때 민주주의를 상승시키는 제도이다.) 야당은 사실상 하나만 살려둠으로써 여야 의원이 무조건 1:1로 당선되게 했다. 그러면 좋은거 아니냐고? ㄴㄴ 국회의 3분의1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즉 여당이 무조건 3분의2를 차지하고 개헌까지 지멋대로 할수있는 의석수를 확보하는 셈. 대통령 선출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제로 이뤄졌는데 대의원선거는 매우 소선거제(읍면동단위)를 채택해서 대의원 선출 과정에서의 부패와 비리, 불법선거 만연에 큰 공로를 세우셨다. 그렇게 해서 99.9%의 통구이식 지지율로 72년 78년 선거를 휘어잡으셨다. (유신체제로의 이행에 대한 국민투표에 대해선 더쓰고싶지만 통들통들할까봐 이만 줄이겠다)

윤치호가 국까의 토대를 마련했다면 박정희는 이승만과 함께 국뽕의 창시자로 불린다 문제는 이 국뽕을 엄한애들이 흡입했다는거지만

비판[편집]

남로당 경력[편집]

박정희는 6.25 전쟁 이전에 남로당 군사총책에 있었다. 그때 박정희는 육군본부 소속 작전정보국에서 근무하였으니 군에 침투한 종북세력의 원조물론 변절한 종북세력으로써도 원조이겠다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여순 반란사건 때 체포되어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백선엽, 원용덕, 김정렬, 장도영 등 만주국 군관 시절 인맥들의 눈물겨운 쉴드질과 남로당 조직원 정보를 폭로통수하여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남로당 색출이 대규모로 벌어지면서 남한의 남로당 세력은 사실상 지하운동 수준으로 바뀌게 된다. 반면 박정희는 6.25을 거치면서 승진루트를 타게 된다. 참고로 박정희의 3째 형 박상희는 대구 10.1폭동에 참여한 좌익세력으로 폭동 당시 경찰의 총격에 의해 사망하게 된다. 그리고 박상희의 딸 박영옥이 김종필과 결혼해서 김종필은 박정희의 조카사위가 된다. 그런데 실상 박정희와 김종필의 나이는 그리 많이 차이나지도 않았고 육영수와 김종필은 고작 2살밖에 차이가 안난다.

한일기본조약[편집]

1965년 체결. 당연히 반대가 심했으나 독립운동가 출신인 최덕신을 비롯한 백색진영 출신 군관들도 이를 추진해야 한다는 목표의식이 있었다. 군사정권답게 데모는 땅크로 밀었다.[5] 박정희 정권은 자금이 급했기에 일제강점기에 대한 배상금을 독립축하금이라는 야리꾸리한 명목으로 3억 달러를 받아들였다.[6] 실상은 식민지에 대한 모든 배상금이었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식민 통치에 대한 배상 책임은 이 조약으로 다한 것이 된다. 정작 징용, 위안부 동원 당사자들은 당시 딱히 받기는커녕 이런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던 경우가 대다수인데[7] 이 조약 때문에 일제시대의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에게 소송을 걸어도 이 조약을 거론하면서 식민 통치 보상에 대한 보상은 끝났다며 배째라 하고 있다. 독도도 현 점유상태를 유지하되 양측이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식의 요상한 내용으로 합의되어 나중에 문제의 씨앗이 되었다. 독도협약은 '이런게 있었다라고 주장되는' 썰에 불과하고 한일 양국으로서부터 공식적인 존재 자체를 인정받은적이 없으며 당연히 물적 증거따위도 없으니 개무시 ㄱㄱ[8]

일본 정부가 웃긴게 현충일날 쑈에 불과한 행사에 참여에 곧바로 당일 일본에 간 노무현에 대해서 어떻게 단 한마디 말도 없을지를 곰곰히 따져야 할 대목이다.일본인이나 지금의 야당이나 말이다. 그리고 일본이 조약 문제로 배째라고 하면 일본은 왜 "당신네들은 6월 6일 현충일이라는 국가기념일에 우리 일본에 방문을 갔냐? 그러면 국가기념일날에 우리 일본에 방문해라. 국가기념일 자체를 없애야 하지 않냐?" 라고 하면 뭐라고 답변해야 할까? 더구나 일본에 가선 김구를 실패한 지도자라고 해서 테러리스트라는 명분까지도 줬다. 김신 장군이 노무현에 대해서 상대할 가치도 없고 투명인간 취급을 했다.

결국 박정희의 경우는 나중엔 조국 근대화의 기틀을 열었으니 조약 운운하는건 그 열등감으로 저러는거고, 일본 정부는 그 노무현이라는 자는 만만해보이니깐 꺼내질 않겠다고 보여진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0&aid=0000191422&sid1=001 그리고 왜 가택연금이니 이러면 일본 측에서 "우리도 가택연금하라고 지시 내려도 되겠네?"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싶으면 2차 대전에 참전한 존 F 케네디나 린든 존슨한테도 불만을 가져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6&aid=0000075856 위에 기사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다

박정희는 케네디가 쿠데타를 승인하는 조건으로 한일 수교를 제시하자 한일 수교회담을 추진했다 왜 케네디에 대해서는 어떠한 비판도 없지? 왜 그를 위인으로 인정하지? 평화주의자로 인정하지?

참고로 저 한일기본조약때 장택상이 친일파 운운을 하는 바람에 박정희에겐 친일의 딱지가 붙었다.

만주 인맥[편집]

박정희가 만주육사 시절 선후배나 동기생 들 그리고 일본육사 선배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중에 백선엽, 장도영, 원용덕, 김정렬, 세지마 류조, 기시 노부스케, 박태준 등이 있다. 이중에 친일파 백선엽은 국방부에서 원수로 추대하려고 했던 사람이고 장도영은 이승만정부 때 육참총장 까지 지냈고 원용덕은 한국전쟁 당시 사단장을 지냈으며 김정렬은 이승만정부 때 국방부장관을 지냈고[9], 세지마 류조는 일본 육사 수석 졸업, 일본 육군대학 수석 졸업, 일본 관동군 참모장 까지 지낸 사람이다. 그래서 10여년동안 포로 생활을 했는데 그것을 바탕으로 소설 불모지대가 나왔다. 그리고 이토추상사 에 입사해 10년만에 회장의 자리까지 오른다. 그 뒤로도 전두환,노태우 에게 조언을 해줬다.[10] 기시 노부스케는 A급 전범 으로 만주국을 건설하는데 힘쓴 사람이다. 오죽하면 만주는 내 (기시 노부스케) 작품이라고 말하고 다녔을까. 그런 놈이 죽지않은 이유는 미국 마음이었다. 55년 부터 시작되 지금까지 계속유지되는 자민당을 만든다. 그리고 기시 노부스케는 아무런 직책도 없으면서 정치를 주무르는 흑막정치를 한다.[11] 그 이외에도 1940년대 일본내 독립운동 단체 중 하나였던 재일건국청년회의 설립자이자 긴자의 호랑이라 불린, GHQ의 유력자 정건형의 소개로 알게된 고다마 요시오 등이 있다. 이들과 박정희는 1963년에 아카사카의 고급 요정에 모여 술을 마시는데 박정희가 일본어로 校長先生お元気でした. "(교장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라고 말했다. 이는 국가원수 라는 사람이 자국언어를 쓰지 않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낮추고 있다.[12] [13] 또 기세 노부스케 에게는 "私たちは、日本の明治維新当時、知事の心と同じです。今後、新しい韓国の建設のために良いフィードバックを聞かせて下さい。岸先生を特に尊敬しま."(우리는 일본 메이지 유신 당시,지사들의 마음과 같습니다. 앞으로 새한국 건설을 위해 좋은 의견을 들려주시길 바랍니다. 기시 선생을 특히 존경합니다.) 라고 했다. 또 오노 반보쿠 에게 편지를 썻는데 이 편지 내용에 자신을 낮추는 말을 썻다. 그래서 한국을 방문했을때 아들의 성공을 보는 아버지의 흐뭇함을 느꼈다고 했다. [14]

친일 행적 논란[편집]

이 부분은 소송의 위험이 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고, '친일인명사전' 에 등재한 민족문제연구소는 2009년 11월 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가 제기한 소송에서 승소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 판례에 의거하여 '박정희 혈서입대는 조작' 이라는 주장을 인터넷에 퍼뜨린 네티즌을 고소했으나, 민문연이 박정희 혈서를 조작했다고 주장하다 고소당한 해당 네티즌은 이렇게 당당히 무죄를 입증받았다.[15]

육군본부에서 발간한 '창군전사'라는 공식기록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비밀광복군이었다고 한다.

친일파[편집]

친일파.jpg

박정희는 일제의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했지만 연령 초과로 1차에서 탈락했다.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자를 증거로 내세운 민족문제연구소의 주장에 따르면 박정희는 만주군에 다시 지원하면서 지원서류에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첨부하여 제출함으로써 반드시 만주군에 들어가려고 했다고 하며, 혈서라고 알려진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

여기까지만 피로 썼고 동봉한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첨부되어 있었다 카더라.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박정희는 과연 친일파 인가?[편집]

박정희가 일본군 장교였다는 걸 들이대면서 친일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시대적 상황을 잘 이해해야 한다. 당시는 민족분열통치(문화통치) 시기 에서 민족말살통치 시기로 넘어갈 시점이었다. 이미 일본정부에서 내선일체 사업으로 당시 조선인들도 민족의식이 상당히 흐려지고, 독립운동도 점점 씨가 말려가는 시점이었다. 단순히 일본군 장교에 복무했다는 사실로 친일파라고 주장하면, 당시 의사나 공무원 등 전문직에 종사했던 조선인(한국인)들도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어야 정상이다.

위에 글 쓴 사람은 일제시대때 계급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것 같다. 일본군 장교는 화족[16]이었다. 화족은 열차에서 2등석을 탈수 있었다. 또 교장이나 군수보다도 지위가 높았다. 이렇게 작은 것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일제는 조선인을 차별했다. 또 차별을 하면서도 분류를 해서 자기들에게 적극협력한 순서대로 덜 차별했다. 당시 조선인이 가질수 있었던 최고의 직업은 면서기 였다.이 지위이상은 보통 올라가지 못하였다. 또한 일본 육사에 지원하기 위해 쓴 혈서는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하겠다고 썻다. 보통사람 이라면 이렇게 쓸 수 있었겠는가? 또 해방되고 나서도 기시 노부스케나 세지마 류조에게 형님으로 모실 수 있었을까?

위에 글쓴 사람은 일제시대의 계급은 커녕 장교라는 개념도 모르는 병ㅇ신인가? 화족은 공후백자남에 해당하는 5등작을 수여받은 귀족을 말하며 그 숫자는 최대였을 때도 1000명을 간신히 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사실상 명예직이었으며 특권이라고 해봐야 명예직인 상원의원 출마자격 집안내규를 정하는것과 문장을 가지는 것과 일본 왕족과의 결혼자격 정도이며 가장 큰 특권인 일본 명문대학 결원시의 특별 입학권은 얼마 안 가서 폐지되었다. 그리고 조선인 화족은 조선귀족으로 따로 분류되어 상원의원 출마자격도 없었다. 당연히 이런 고위명예직을 수십만에 달하는 장교들에게 펑펑 찍어 줄수 있을 리가 없으며 이들만 장교가 되면 500만에 달하는 일본군은 어떻게 유지한단 말인가? 장교가 교장이나 군수보다 지위가 높다는 것은 군국주의 사회의 일본에서 일본군 특히 장교는 천황의 직속부하이며 초 법적인 존재라는 인식 때문이다. 이는 오사카 고스톱 사건에서 볼수 있듯이 일본 내부에서도 꽤 논란이 되었던 문제이다. 또 한일합방 이후 일반시민 계층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암묵적인 차별은 존재했지만 형식상으로는 전혀 없었으며 조선인이라도 군인이 된다면 계급에 따라 대우를 해주기 때문에 군인이 일종의 출세루트로 각광받은 것 뿐이다. 그리고 위에서 면서기가 최고의 직업이니 뭐니 하는 아스트랄한 주장은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군인이 초 법적인 지위를 가진 일본에서 조선인 군인이 분명히 존재하고 평민 출신에서 소장까지 올라간 홍사익 같은 사람도 존재하는데 면서기 운운하는건 셀프 병신인증 밖에 안된다. 또 문관 출신으로 한정해보아도 보통 실권없는 교육계쪽 한정이지만 장관급 조선인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식민지 경영국의 입장에서 식민지정책에 협조하는 사람을 우대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데 그게 어떻단 말인가? 또 좌좀들이 주로 들먹거리는 혈서는 박정희만 쓴 것이 아니며 그 당시에 전세계에서 1차 세계대전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당시 모든 아랫사람들이 윗사람들에게 충성을 다하기 위한 일종의 유행의 하나였다. 그리고 위에 글쓴 놈이 말하는 일제강점기 보통 사람들은 장교는 커녕 병사로도 입대하지 못해서 안달이었던 사람들이 더 많다. 또 식민지시대의 식민지지식인과 지배국고위층들의 관계는 의외로 보편적인 현상이며 민족반역자 운운할 문제가 아니다. 인프라의 대부분이 지배국에 있는데 어쩌란 말인가? 간디도 영국 유학생 출신이며 호치민의 지인들 중에 프랑스인들도 많았으며 베트남 독립 이후에도 교류하면서 지냈다. 한국으로만 한정해봐도 김구나 이승만같은 해외파들이 예외적이지 여운형은 일본 유학파이며 해방 후에 조선내 일본인들의 철수를 몰래 도와주기도 했으며 후기의 독립군 지휘관들 중의 다수는 만주제국군관학교나 일본사관학교 출신들이었다. 당장 김대중 대통령만 해도 과거 일본인 스승에게 찾아가서 일본말로 대화를 나누는데 일본인이랑 관계가 있다고 친일파로 매도하는건 박정희의 친일파 프레임 씌우기에 눈이 멀어서 이것저것 갖다붙이는 것일 뿐이다.

조선인들이 차별을 받았건 어쨌건 간에 당시 조선인들이 점점 민족의식이 흐려져갔던건 엄연한 사실이다. 한 예로 광복이 되었을때 20 ~ 30대들은 만세를 부르고 있는데 소학교(초등학교)다니는 아이들은 멀뚱멀뚱 그것을 쳐다보면서 "형, 우리나라가 일본이 아니야? 우리나라가 졌는데 왜 그래?"라고 이야기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심지어 일본의 모 어류학자의 회고록에선 국민학교에서 교사를 하던 시절에 해방을 맞자 교실로 뛰어들어가 "얘들아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었다!"라고 외쳤는데 학생들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우리 일본이 망하다니!"라고 슬퍼했다고 한다. 만약 추축국이 승리했다면에서 현재 우리는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한체 일본의 부라쿠민정도의 대우를 받으며 살아갔을 가능성도 있다. 더군다나 박정희는 경술국치 이후에 태어난 사람이다. 그리고 박정희는 젊은 시절부터 군인이 꿈이었으며, 나폴레옹&이순신 등의 군인들을 존경했다. 아무리 당시가 일본의 식민지시절이고 해도 굳이 자신의 꿈까지 포기해야 했을까? 물론 독립군이 될수도 있었겠지만 훈련을 더욱 잘 받기 위해서는 일본군에 지원했을 가능성도 있다. 혈서를 썻다면 그것 또한 군인이 되기 위해 사용한 하나의 수단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위에 글을 쓴 사람은 자기가 셀프논파에 말도 안 되는 쉴드질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것 같다. 우선 다까끼는 광복 때 만세를 불러야 정상인 20대였으며, 분명히 민족의식이 남아있던 세대 주제에 혈서까지 쓰면서 녹을 받아먹으려 했던 인물이다. 그것도 '독립군을 토벌할 가능성이 있는' 만주국 군관이 되기 위해 말이다. 일례로 그의 출세에 도움을 준 백선엽 장군이 다까끼와 같은 만주국 군관이었으며 그는 실제로 독립군을 토벌한 경력이 있다. 그리고 민족을 위해 꿈을 포기해야 했냐고? 그러면 일제시대 때 창작욕구를 견디지 못하고 일제를 찬양하는 글을 써내린 장지연, 이광수같은 작가들은 친일파가 아니라는 소리인가? 정말로 참군인이 되고 싶었다면 장준하 선생처럼 일본군에서 훈련받다 탈영해서 독립군을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게다가 다까끼가 젊은 시절에 존경했던 인물은 원조 빨갱이답게 이순신이 아니라 나폴레옹, 무스타파 케말같은 역성혁명의 지도자였으며 이순신은 자신이 정권을 잡고 난 뒤 귀신같이 태세전환을 하며 빨기 시작한 인물이다.

20대가 만세를 불러야 한다는 건 어디서 나온 개논리인지도 이해가 안가고 민족의식이 남아있었는지도 지 주관적인 판단일 뿐이다. 그리고 일본의 지배가 오래되어서 완전독립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헝가리인들처럼 조선인들의 자치권을 보장받고 제국국민의 일원으로 확실히 인정받자는 온건독립파들의 활동이 서서히 등장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애초에 조선 민족의 국가는 이미 없었으며 민족해방을 위해서 일한다는 독립군과 임시정부는 자기들끼리의 이념대립과 내분으로 와해되어 유명무실한 상태였으며 조선인의 절대다수는 어디까지나 일본의 구성민족 중 하나였다. 그런 상태에서 일본군에 들어간다는건 나쁘게 봐도 자기 출세하려고 정부의 지배에 순응하고 고통받는 민족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정도지 민족의 반역자 새끼로 취급 될 일은 아니며 일본 내에서의 조선인의 지위향상을 위해서 일본의 공직에 오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실제로 박정희는 교사시절 때부터 조선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교육했다는 증언도 있다. 그리고 만주군이 싸웠다는 군대는 중국군(팔로군)이며 중국군에 독립군 출신들이 소속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건 중국군 소속 조선인들과 일본군 소속 조선인들의 싸움이며 독립군 탄압보다는 소수민족의 비애에 가깝다. 중국군과의 교전을 독립군 토벌이라고 봐도 애초에 박정희가 소속된 부대는 중국군과도 교전한 적이 없다. 만주군에서 중국군과의 교전 사실이 있다고 만주군을 독립군 토벌하는 부대로 보는건 지나친 비약이며 박정희가 만주군에 지원한건 만주군은 일본군보다 조선인의 수용에 있어 개방적인 입장이 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많이 지원하던 루트였던것 뿐이다. 훈련받다가 탈영해서 독립군 하라는건 확실히 그렇게 한 사람은 대단하며 인정해줘야 하지만 안 했다고 욕먹어야 할 일은 아니다. 자기가 이룩한 성과를 다 던져버리고 미래도 불투명한 적국군대에 들어가는건 쉬운 결단이 아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랑 무스타파 케말을 빠는게 뭐 어쩌라고! 나폴레옹은 식민지 출신에서 프랑스 황제가 된 먼치킨 인물이고, 무스타파 케말은 장교가 되어 망해가는 국가를 구해낸 영웅이며 지금도 터키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국부다. 역성혁명운운하고 자빠졋네!

장지연 이광수같은 작가들은 친일파? 응? 이상하다. 여운형은 친일파짓 했고 빨갱이짓도 했고 수꼴짓도 했고 못하는게 없었는데? 여운형이 친하게 지낸 인간 중에 한 사람이 다름아닌 오오카와 슈메이같은 일본 전범이다. 오죽하면 여운형 친일설의 원조가 송진우였다. 참고로 박정희가 독립군 토벌설에 대한 팩트를 제시하면 좋겠다. 여운형이 오오카와 슈메이랑 친하게 지낸거는 당시 신문에도 쫙 나와있다. 여기서 장자연 이광수를 꺼내면 여운형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logId=314342&userId=mijinco 여운형의 경우는 만약에 외국인으로 태어난 경우를 상정해서 미국과 중국이였더라면 히로히토나 도조 히데키 같은 인간쓰레기들이랑 영국과 프랑스였더라면 아돌프 히틀러나 파울 요제프 괴벨스같은 인간쓰레기들과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그냥 알짤없이 뒈졌고, 더구나 미국의 트루먼 정부, 중국의 장제스 정부, 영국의 처칠 정부, 프랑스의 드골 정부는 모두 우파 정부였다. 결국 여운형은 이래나 저래나 뒈졌지만.....

일제강점기에 한국(또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정치적 군사적 활동을 하는 독립군 조직들이 있었고, 당시 평범한 이해력이 있는 한국인이면 그런 조직이 있단 것과 그 독립군들의 가장 큰 적이 일본 군경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에 입대, 그것도 징병이 아닌 자원해서 장교로 입대해 복무를 한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때 당연히 친일이다. 일부에서(그쪽 부류의 대부분일수도 있지만) 직업선택의 자유 운운하는데 독립군을 때려잡는 조직에서 일하는 걸 직업선택의 자유라고 넘어가는건 목숨걸고 독립운동한 선조들에 대한 모독이다. (독립유공자들 모아놓고 '박정희'라는 주어없이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자를 친일파로 봐야할지 어떨지 여쭤보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사족을 붙이자면 일제강점기에 독립군의 적대세력에 가담한 자들은 한국이 독립했을때 청산당할 각오 정도는 했어야 한다.(그런데 우린 그걸 못했지.)

애초에 훈도(교사)라는 직업 자체가 군인보다 친일적인 부분에서 더 떳떳하다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아이들에게 황국신민화 교육을 가르치고, 강요하는 역할을 맡았던 그보다는 만주군 행정장교가 그나마 나은 거 같은데?

그리고 소위 '자발성'의 문제를 논하자면, 장준하 선생도 자발적으로 입대했으니 친일파라고 하겠다. 장준하선생은 물론 개인 사정이 있었지만. 여기서 자발성에 관련된 문제를 찾아보자면, 앞뒤안가리고 그냥 입대했다고 획일적으로 친일파라고 모는 건 결정적 근거가 부족하고 너무 결과론적이다.

일제의 경제적 침탈로 빈농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으며, 가난을 벗어나는 길은 오직 '출세'뿐이었다. 그 길 중 하나가 군인이 되는 것. 일반 민중이었던 사람에게 고되고 힘된 독립운동의 길, 그것도 거의 쇠퇴하여 거의 소멸한 독립운동의 길을 걸으라고 하는 건 다소 위선이 아닌가. 그런 길을 택한 분들 (ex.김준엽, 장준하 등)을 존경해야 옳은 것이지 박정희같은 케이스를 까는건 좀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조선사람이 군경이 되면 절대로 안된다고 하면, 일본에서 더 많은 왜인들이 건너와 우리 국민을 무참히 짓밟아야 옳았던 건가? 저런 식의 논리라면 이 나라 국민 중 알만한 직업을 가진 사람은 거의 다 친일파였던 셈이다. 하버마스가 "미래에 태어난 자의 특권"을 부정한 이유를 생각해보라.

역사가가 사용하는 개념적 표현 가운데 '후손들의 오만함'이란 말이 있다. 현대의 잣대를 과거에 들이대고 왜 그런일을 했느냐고 선대 사람들을 꾸짓고 비난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 꼴을 보니 딱 이말에 들이 맞는듯 하다.

자원입대 형식을 취한 학도병 강제징집으로 끌려간 장준하 선생이 자원입대라고?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들도 일본인으로서 일본군을 위해 위안부했으니 일본에 사죄요구하지 말라고 하지? 장준하 선생이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했으니 친일파라고한 저능함에 탄복할 뿐이다.

장 선생보고 친일파라고 한게 아니라, 앞뒤안가리고 '자원입대'라는 이유로 친일파라 함은 지나치게 결과론 적이라는 말. (장선생이 사정이 있어서 자원입대했다고 위에 써져있을텐데?) 누구 맘대로 그런 기준을 누가 만들어 그런식의 엿장수 맘대로 수준 날림기준으로 타인의 인격을 살인하는게 과연 옳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애초에 그런식의 결과론적 판단이라면, 일제한테 동아회 관련해서 녹 받아드신적 있으신 여운형 선생도 욕 먹어야지. 그렇지 않나? 그리고 여기서 위안부가 왜나와 ? ㅋ 위안부는 애초에 지원이 아니라 강제로 끌고 가거나 취업사기, 혹은 소수의 경우지만 인신매매로 끌려 간건데... 그리고 (오만하게 들린다면 죄송.) 위의 왼쪽의견은 반박이라기 보단 다소 꼬투리잡기 비슷한것같은데.

자원입대 그 사실만으로도 당연한 친일이다. 감히 독립유공자들이 여전히 살아있는 대한민국에서 일제강점기 일본군 장교로 자원입대를 친일이 아니라고 하는 불경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불쾌하다. 결과론이고 나발이고 독립유공자들 모아놓고 한번 물어보라고. 독립군을 색출하고 고문하고 죽이던 일본군에 자원입대해서 복무한게 친일인지 단순한 직업선택인지.(물어볼 용기는 있냐?ㅋ) 누가 정한 기준이냐고? 식민지인으로 살았던 선조의 후손이 정한 기준이다. 침략자의 군대에 장교로 자청해서 빌붙은 놈들은 독립군 토벌을 했던, 행정일을 했던, 다른 장교 구두를 닦았던 당연히 친일이다. 그리고 여운형? 여운형 선생은 독립운동하긴 했지만 친일행적에 대한 논란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니 나중에 결정 나봐야 아는거고.(꼬우면 박정희도 독립운동한 근거 들이대서 친일 논란 잠재우던가.) 자원입대 형식 강제징집을 자발적 입대로 본다면 취업사기 당해 끌려간 일본군 성노예 할머니들도 돈받고 몸판걸로 봐야 되냐는 예시 같은데 그걸 이해 못해서 꼬투리 잡기 취급?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 지 모르겠다만, 혹 '후손들의 오만함'이라는 말을 아시는지 여쭙고싶다. 인간의 행위를 현재 입장에 따라 사후적으로 판단하고 비난하는 태도를 역사학자들은 '후손들의 오만함'이라고 표현하는데, 아무리 봐도 위 주장은 후손들의 오만함, 다르게 표현하면 '미래에 태어난 자의 특권'이라는 말에 딱 맞아 떨어지는 상황 아닐까 생각된다.

다소 물타기로 들릴 수 도 있겠다만, 당시의 시류(時流)를 생각 해 볼 때 자원입대라는 것은 그다지 문제될 것도 없다. 1910년대도 아니고, 1920년대도 아니고, 1930년대 초기면 몰라도 1939년에 자원입대한게 그렇게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고 판단된다.

a0077755_4c67aa4062480.jpg 위 자료(昭和 14年 작성, 陸軍特別支援兵) 를 보면 알겠지만, 당시 전국서 12,348명이 입대지원하여 626명만이 합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가지 눈여겨 봐야할 것은 육군장교후보생을 양성하기 위해 모집했던 육군예과사관학교 지원현황인데, 일본인들은 275명이 지원해서 17명이 합격했고, 조선인들은 36명이 지원해서 4명이 합격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냐면, 오히려 조선이 일본보다 더 채용률이나 경쟁률이 더 높았고, 조선인이 日 장교가 되는 건 어렵지 않았단 것.

그리고 다음 자료를 보자면, http://cfile25.uf.tistory.com/image/113CAD3850D739FB011229 대표적 친일단체인 국민총력연맹의 현황을 보자면 1940년 기준, 마을 단위 행정 기준으로 가입한 사람이 총 4,141,499명이고, 각종 연맹을 통해 가입한 이들은 1,777,862명이다. 이게 당시의 현실이었단 것.

일제강점기 조선인 지원병 제도 연구, 표영수, 2008, 숭실대학교(박사과정) 논문에 의하면, 일제의 강요도 다소 있었지만, 당시 조선인들은 약 80만명이 자원입대 지원하여 1만 6천명이 합격했다. 즉 평균 50대 1의 경쟁률. 이것들과 친일인사들의 요청으로 인해 조선인의 참정권이 1946년에 약속되기도 했다.

단적으로 표현해 당시 광복군이 300명 내외였는데 80만명이 자원입대를 지원했다. 이런 상황에서 단순히 자원입대를 했다고 악질친일파민족반역자라고 하는 건 그야말로 후손들의 오만함 아닐까.

그리고 박정희가 자원입대한 건 단순 출세욕이 아니다. 후술하겠지만, 박정희는 예전부터 계속 일본 교사들과 갈등을 빚어왔고, 어느날 큰일이 터진것이 큰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박정희 본인의 증언도 후술하겠다.

어느 해인가 시학관이 학교로 시학을 온다고 연락이 와서 3학년 여학생들이 옷을 잘 차려입고 정류소 앞에 도열해 기다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박 선생님은 학교에서 평소 좋아하던 나팔을 불고 있었는데 급사가 가서 내려오시라고 해도 듣지 않자 일본인 교사들이 가서 박 선생님을 집단 구타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 후 박 선생님은 '내가 꼭 복수해 주겠다. 조선에는 사관학교가 없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고 얘기하신 적이 있습니다. - 이순희 (정운현, 실록 군인 박정희)

석룡아. 내게는 군인이 되어야 할 이유가 있었단다. 군인이 아니면 도저히 행세할 수 없었거든. 전부터 요시찰 인물로 찍혀있던 상황이고.. - 박정희 (뉴스위크 929호 취재 참조)

이외에도 조갑제나 정운현등의 취재결과로 볼 때, 박정희는 어릴 적 부터 개인적인 진로가 군인이었던것 같다. 영향을 많이 준 인물들로는, 日 전국시대 영웅, 무장들과 명치유신의 유신지사들, 그리고 이순신, 나폴레옹등이 있었다. 조갑제의 취재에 의하면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단재 신채호 전집>, <백암 박은식 전집>등을 즐겨 읽었다더라.

그리고 박정희가 독립운동한 증거 갖고 오라고 하는데, 일단 박정희가 민족정신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내용들이다. 출처는 정운현 기자와 조갑제 옹의 취재들.

부임 당시 나는 6학년(13세)이었는데 박 선생님께서 5~6 학년을 상대로 조선어 강의를 했습니다. 한번은 수업시간에 교재에 없는 이순신 장군 얘기를 들려주시면서 급장 이응순을 복도에 세워 감시토록 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인 교사가 오면 이응순이 문을 두드려 신호를 보냈는데, 그러면 박 선생님이 와깠다나? (알겠나?) 하고 일본말로 물으면 우리는 시치미를 뚝 떼고 하이(예)! 하고 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 조성호

한번은 박시복이라는 학생이 수신 교과서에 실린 일본 천황의 그림에서 천황의 눈을 연필로 문질러 한쪽 눈을 애꾸 눈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일본인 교사에게 발각되어 박시복은 두들겨 맞고 그의 부모는 주재소6에 끌려가 조사를 받는 등 난리를 피운 적 있어요. 그런데 박 선생님이 나서서 '그들은 일본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다'고 변호해 주어 이 일을 무마시킨 적 있지요. - 조성호

박 선생님은 우리끼리 있을 때는 꼭 우리말을 쓰자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아무 의미도 모르고 '선생님 조선 말 하면 퇴학당하는데 왜 그래요'하고 반박을 한 기억이 납니다. - 정순옥

박 선생은 5학년에게는 조선어를 가르쳤다. 한글을 배워야 민족혼을 이어 갈 수 있다고 암시했다. 나는 5학년 상급생들이 '왜 우리나라는 망했지', '우리나라의 국기는 어떻게 생겼나'라고 소곤대는 것을 듣고는 박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영향이라고 생각했다. - 주영배

제자 이영태는 박정희 선생이 조선어 시간에 태극기에 대해서 가르쳐주었다고 증언했다. 박정희는 복도를 향해서 입초를 배치한 뒤 우리나라의 역사를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대구사범때 김영기 선생이 쓰던 방법이었다. 박 선생은 또 음악시간엔 황성옛터와 심청이의 노래를 가르쳐주었다. 이영태는 박 선생을 통해서 임시정부가 상해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영태는 박 선생이 경찰 지서의 사찰주임인 오가와 순사부장하고 자주 논쟁하는 것을 보았다. 제자 박준복의 증언에 따르면 박 선생은 일본인 교사들하고도 사이가 좋았는데 아리마 교장과 야나자와 교사와 말 다툼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박정희가 담임했던 5학년의 급장이었던 신현균은 박 선생이 특히 우리말의 지도에 열성을 보였다고 기억했다. - 조갑제

박정희는 평소엔 말이 적었지만 술만 들어가면 말도 좀 하고 어허허 하면서 호탕하게 웃기도 했지요. '황성옛터도 뽑고요'. - 허동식

박정희는 일본어를 의식적으로 덜 쓰려고 애썼다. 하루는 일본교사와 싸웠던 듯 하숙집에 돌아와서는 '그 새끼를 때려죽이려다가 놔두었다'고 씩씩대면서 말했다. - 허동식, 임창발

우리는 조선사람이다, 우리 글과 우리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이순신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일본의 영웅들이 이순신 장군에게 패주하는 이야기를 듣는것만으로도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거북선 그림을 그려가면서 실감있게 전투장면을 묘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왜놈들이 배 지붕으로 올라오면 송곳으로 찌르게 만들었다느니 물 속으로 잠수까지 했다느니 하시면서 몸짓을 해가며 연기를 하시는데 흥분 그 자체였습니다. - 이종기

하루는 박 선생님의 조선어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가토 선생이 먼저 와서 우리를 작업장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때 박 선생이 들어오다가 가토와 마주쳤어요. 박선생이 '왜 조선어 시간인데 일을 시키려 하느냐'고 대어들어 언성을 높이면서 말 싸움을 하는 바람에 우리는 작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 강석해

어느 날 나와 몇 아동들이 놀고 있는데 교무실 현관에서 노성이 들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 일본인 중년 신사가 박정희 선생님을 화나게 했었다는 것이다. 이 일본인은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어이, 교장은 있는가'라고 박정희 선생에게 물었다. 박 선생은 불손한 태도에 어이가 없어서 대꾸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다시 그 일본인이 '어이, 교장은 있어?'라고 말 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이렇게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너희 일본인들은 말끝마나 내선일체라고 하면서 기껏해서 이런 식으로 조선 사람들을 대할 수 밖에 없는가. 일등국민이라고 자칭하고 싶거든 먼저 교양있는 국민이 되어리. 담배를 물고 교무실에 들어오는 것부터 고쳐라. - 전도인

일어 상용으로 학교에서 조선말을 사용 할 수 없게 되자 박정희는 수업시간에 몰래 조선어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또 한번은 둥근 원을 그려 그 속에 가로로 물격무늬를 그려 넣고는 '보기만 해!'하더니 '이게 조선 국기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절대로 나가서 이런 얘기 하면 안돼!'라고 주의를 주고는 태극기 그림을 찢어버렸는데, 한 학생이 다른 반 아이들한테 '우리 박 선생님한테 이런 거 배웠다' 고 자랑을 한 것이 일본인 교사 귀에 들어가 '불온교사'로 찍혔다는 것이다. - 이순희

어느 해인가 시학관이 학교로 시학을 온다고 연락이 와서 3학년 여학생들이 옷을 잘 차려입고 정류소 앞에 도열해 기다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박 선생님은 학교에서 평소 좋아하던 나팔을 불고 있었는데 급사가 가서 내려오시라고 해도 듣지 않자 일본인 교사들이 가서 박 선생님을 집단 구타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 후 박 선생님은 '내가 꼭 복수해 주겠다. 조선에는 사관학교가 없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고 얘기하신 적이 있습니다. - 이순희

군인시절의 이야기들이다.

조그만한 체구이지만 어깨를 딱 벌리고 당당하게 걷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가끔 둘이 만나면 조국의 비통한 현실을 개탄하면서 같이 울기도 하고 결심을 밝히기도 했다. - 이한림 (본인 회고록)

솔직히 말한다면 나는 그때 일본사람이 다 되어 있었따. 그런 나의 눈에 비친 박정희는 달랐다. 그는 특히 2. 26 사건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배울것은 군사학 뿐이다. 우리는 독립을 해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내가 '독립이 무엇인가'라고 했을 때 박정희는 간단하게 답하는 것이었다. '독립이란 혼자 사는 것이다. 남의 간섭 안 받고 우리 스스로 사는 것 이다. ' - 이섭준

자네는 여기 왜 왔는가'라고 물었다. 박정희가 당돌하게 말하는 것 이었다. '왜놈 보기 싫어 왔소'. - 이기건

박정희는 '일제는 곧 망합니다. 우리는 독립하고야 말 것 입니다.'라는 말을 되풀이 했다고 한다.-정일권

박정희는 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선배님들, 이 노래 모르시죠' 하더니 주먹질을 하면서 노래했다. 들어보니 독립군 노래였다. - 정일권, 박기병

이렇듯 박정희는 '독립'을 염원한 군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친일파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긴 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문경보통학교 아래에 있는 네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누런색 군복에 빨간 견장, 붉은 군모, 그리고 에리에는 별이 하나 그려져 있더군요. 그리고 칼을 하나 차고 있었는데 칼끝이 땅에 닿을 정도로 길었습니다.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교사 시절 박 선생님을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 - 이순희

박 선생님이 만주 군관학교 생도 시절이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한번은 문경에 오셨는데 주재소의 오가와 순사가 당시 주재소에서 급사로 일하고 있던 전장수를 시켜 박 선생님을 불러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박 선생님이 '볼일 있으면 네가 와라.'며 주재소 출두를 거부했습니다. 당시 주재소에서 오라고 하면 보통사람들은 겁부터 먹고 냅다 달려가던 시절이었죠. 박 선생님의 얘기를 전해들은 오가와 순사가 화를 내며 당장 쫓아올라 왔습니다. 그런데 와 보니 그 옛날 박 선생이 붉은 군도를 방문 앞에 떡하니 꽃아놓고 위풍당당하게 앉아 있지 않겠어요. 그 모습을 본 오가와 순사가 기가 죽어 몰라봤다며 도리어 박 선생님을 정중히 대접했다고 합니다. - 조성호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2&aid=0000043430&sid1=001 위 기사에 실린 이기청씨의 회고에 의하면 박정희는 독립군을 도왔다고 한다.

필자는 의병정신선양회 활동을 하며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을 자주 뵈었다. 백강은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파가 함께 묻힌 국립묘지 애국자묘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유언을 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다. 그 백강 선생이 하루는 내게 박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면목동 집으로 찾아왔는데, 큰절을 하더라는 것이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길래 보니 박정희였다.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소좌의 도움은 컸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박정희는 조선건국동맹에 참가했다. 정확히는 조선건국동맹 만주분맹 군사위원회. 조선건국동맹 만주분맹 군사위원회라는 것이 무엇이냐면 만주군 내의 항일적 성향을 지닌 만주군 조선인 장교들이 모여서 만든 일종의 비밀 애국 단체였다. 여운형 밑의 박승환을 주축으로 만들어졌으며 8월 29일 국내진공계획을 하려던 단체였다. 여기에 참가한 사람으로는 박승환, 박창암, 이상렬, 박준호, 최창륜, 최남근, 문용채 등이 있다.

그런데 여기 박정희가 참여했다는 증언이 있다!.

신경 비행대에 있던 최창륜이 1기 후배인 박정희를 2기생 대표로 추천한 것으로 기억된다. 박정희와의 연락은 그가 맡았을 것이다. 박승환이 해방 전에 박정희를 직접 만난 적은 없다고 본다. - 박준호

이외에도 최창륜, 방원철이 이와 비슷한 증언을 남기기도 했다.

http://m1.daumcdn.net/cfile207/R400x0/237B843752960C00072033

해방삼년사라는 책에도 그 사실을 위와 같이 밝히고 있다.

그가 독립운동을 했다고 까지 보기는 어렵지만, 확실히 친일파와는 거리가 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조선건국동맹 관련 내용은 지만원이나 김대령같은 양반들이 주장하는 박정희 비밀광복군설은 아니다. 오해하지 말길 바람.

아주 소설을 쓰고 있다. 조갑제의 취재결과? 조갑제가 어떤 인물인지 몰라서 그 사람의 취재를 근거로 내세운단 말인가. 조중동 기자들에게 물어봐도 조갑제는 결코 공정한 언론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 양반은 김대중, 노무현을 까는거라면 없는 자료도 만들고, 그들에게 유리한 자료는 왜곡시켜서라도 깔 양반이다. 이승만이나 박정희에 대한 찬양 역시 그런 식으로 할 거고. 박까들이 민족문제연구소 자료를 가져오면 박빠들은 인정할 것인가? 그리고 명시적인 증거도 없는 '누가누가 말했다 카더라' 따윈 아무리 복붙해봤자 조갑제나 구로다 가쓰히로가 내뱉는 수준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지면 낭비이니 자제할 것. 박정희(다카키 마사오)가 친일파인 이유는 간단하다. 남미 같이 유럽제국의 식민지 생활을 수백년간 해와 독립이란게 의미 없어진 상황도 아니고, 여전히 독립군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국민학교 교사라는 징집대상에서도 제외되는 번듯한 직업을 가졌던 자가 자진 창씨개명까지 하며(김대중 같이 강요받아 한게 아니고 자진해서 한거란게 중요하다.) 일본군에 장교로 입대한 것.(굳이 독립군들의 최대적인 일본군에 말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독립 대한민국에서 박정희는 당연히 친일이다.

무슨 장택상이 "한일회담을 한일합방이다." 같은 소리를 하고 자빠지실까? 참고로 박정희는 친일파란 그 논리의 제공자 중에 한사람이 창랑 장택상인데 웃긴게 장택상의 측근이 노덕술이었다. 장택상이 비호했던 노덕술의 행각은 박정희를 넘어서고 장택상은 더구나 해방기에 친일파들 중에서도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 고문이나 하고 다녔던 인간들을 경찰로 기용했던 막장 중에 한사람이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에게 수 많은 해악을 끼친 인간이다. 더구나 대상이 자기가 그렇게 때려잡고 나중엔 심하다 싶어서 공산주의자 구명을 했는데 그 한명이 대변인이었던 김대중이고 또 말빨 수준이 범부 수준이 봐도 의심스러운 인물을 기용했는데 그 한명이 YS였다. 친일파 논쟁도 웃긴 일이 그 박정희에게 친일 딱지 붙인 인간 중에 한 사람이 장택상이다. 웃긴 것이 그 장택상의 애비가 친일 부호였던 장승원이다. 장택상이 독립운동의 행적조차도 의심되어서 이범석 장군조차도 장택상을 매국노 취급하고 다녔다. 뿐만 아니라 장택상은 이철승 선생도 노덕술 문제로 거하게 논쟁을 해서 과감히 갈라섰던 사람이다. 장택상처럼 내로남불 친일을 떠드시면 되나 그리고 친일파임에도 왜 김구의 아들인 김신 장군이 군정에 붙었고 반민특위에 주요인물인 곽상훈 선생조차 육영재단 이사장이 되었을까? 툭 까놓고 친일 문제에서 장택상의 아비는 그렇게 자유롭나? 자기 말대로 죄파 때려잡겠다고 그 노덕술을 비호하고 웃긴게 이철승의 증언대로 교도소나 박살낸 남로당 출신인 김대중을 대변인으로 쓴 장택상이는 그렇게 잘했나? 박정희의 친일을 논하기란 악질 친일파를 비호한 장택상이나 그 아비인 장승원이나 조기숙의 조상인 조병갑이만 봐도 차라리 박정희가 나을 지경이다 참고로 그런 군상들을 제거하기 위해 동학농민운동에 접주이자 아비인 박성빈도 참여했다.

친일 논란하니 이야기를 해주는 것인데 참고로 이야기를 해서 박정희 뿐만 아니라 내가 하면 애국이요 누구는 친일파 딱지라는 드립의 원조격은 매천 황현으로, 매천 황현은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모조리 폭도로 몰았다. 김구 선생을 비롯해서 박성빈까지 죄다 폭도가 몬 것이다. 그 매천 황현도 웃긴게, 장승원은 그렇게 욕해놓고 정작 장승원이라던가 조병갑을 쳐죽이려고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나자 농민들에게 폭도라고 붙인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했던 자였다. 자살도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들에게 썰리기 때문에 했다는 썰이 너무 드는 것이 이후에 자신과 다를게 없던 장승원이 독립운동가한테 썰렸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매천 황현은 저런 말 한마디로 양반들이 죄다 뭉쳐 동학도들을 토벌하는 빌미를 제공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했다. 단 박정희 대통령이 동학도들을 폭도라고 한 자에게 서훈을 준것은 그가 자결을 했기 때문에 준것이다. 꼭 누구랑 비슷하다.

경제성장은 오로지 서민들만의 힘?[편집]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좌빨러들은 박통 당시 이루어졌던 경제성장이 경제 주체인 노동자와 서민층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고 호도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이런 서민들과 노동자들의 피땀 위에 올라온 경제 성과를 독재자와 부패한 기업가가 숟가락만 얹었다는 논리.

하지만 이는 잘못된 비판이다. 당장 조직의 성장에 있어 지도자의 중요성은 아직까지도 부각되고 있으며 서구의 흔히 모범적인 기업이라 불리는 기업들 또한 기업 지도자층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경영학의 근본마저도 부정하는 근시안적인 비판이며 말 그대로 '까기 위해 까는'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근저에는 국민들의 성실성, 노력이 아주 중요한(사실상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폭발력을 정확한 방향으로 표출시키는 것이 지도자의 역할이고, 그 방향에 따라 좋은 지도자와 나쁜 지도자로 평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독재를 했다', '한국 경제를 대기업위주의 경제, 수출위주의 경제로 만들어 서민경제 불안 요소를 심었다'는 사실을 비판하는 것은 올바른 비판이지만, 경제성장에 있어서 한 것도 없이 숟가락만 얹었다 식의 비판은 옳지 않다.

반박[편집]

하지만 박정희의 경우엔 상황이 매우 다른데 박정희가 한 것들마나 실패한 것들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섬유,가발,합판 등 손댄 경공업마다 2,3년후엔 모조리 망했고, 중화학도 몇몇 대기업들에게 특혜를 주다가 90%가 도산...결국 오일쇼크로 경제가 망하는데 일조했다.

차관산업과 2번의 화폐개혁 단행 등 실수한 것들이 많았고, 물가는 한국전쟁 때처럼 20%나 급상승하는 살인적인 물가와 부동산은 폭등해서 경제가 매우 불안정했고, 투기꾼들이 엄청난 돈을 벌게 되었다.

18년 내내 김일성, 김정일처럼 언론통제와 강압적인 방식으로 국민을 억압했지만 리베이트와 각종 사고, 부정부패는 끊이질 않았고,

결국엔 세계 4위의 빚더미로 국가가 망했다. 당시 필리핀이 세계 3위 빚더미로 망한 걸 생각하면 한국이 얼마나 처참하게 망했는지 상상이 가는데.. 미국은 냉전상황인 한국이 망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기에 박정희 사후에도 한국을 지원해서 북한처럼 되지 않은 것이다.

박정희 찬양자들은 박정희 공과론을 언급하지만 공은 대부분 김일성, 히틀러 찬양자들이 그러했듯 날조,왜곡된 것들이 많으며, 오히려 경공업,중화학공업처럼 쑥대밭된 것들이 상당수다.

그리고 북한보다 잘산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그가 집권하고 나서 거둔 성과는 250억 달러 적자로 김영삼(374억 달러 적자)에 버금가는 공황을 남겼다.

박정희 찬양자들은 경제성장률 무역상과를 언급하면서 조작하지만 당시엔 전세계 경제호황기로 대부분의 국가들이 엄청난 성장을 보였고, 무능한 김일성이 집권했음에도 북한이 한국보다 오히려 앞서가던 시기였다 (북한도 625 한국전쟁으로 처참하게 망했었다)

반박의 반박[편집]

위의 편집자는 정신이 어떻게 된 게 틀림없다. 명백한 좌빨의견을 진실이라고 써놓으면서 심지어 그 팩트도 경희대 모 교수가 논문같지도 않게 쓰고 학회에서 실리지도 못해서 타 학회 단행본에 억지로 실어놓은 논문 하나를 박정희 경제성장의 진실이라고 실어놓은 명백한 선동글이다.

우선 경공업의 측면에서 보자면, 실제로 한국의 가발산업은 전혀 망한적이 없고 면 산업은 미국의 지원이 끊기면서 박정희 집권 전에 이미 망한 상태였다. 거시적 측면에서 보자면 한국의 경공업 생산액은 사실 이승만 정권때부터 매년 20퍼센트 정도씩 꾸준히 성장하다가 4공화국(유신) 시절에 조금 주춤했던 정도고 중화학 공업에 있어서는 철강, 조선, 정유, 화학 등 뭘 보고 망했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을만큼 폭발적인 성장을 이뤘다(어느 해에는 3자리 성장도 했다. 1년만에 산업규모가 두배가 넘게 커졌다는 소리)

일본의 차관에 대해서는 저 동남아국가보다 우리나라가 훨씬 가난했기 때문에 당연히 빌릴 수 있는 돈이 적었기 때문이며 실제로 저들 나라는 후에 일본에 원자재 이권을 몇몇 양도해서 채권을 지불하였다. 우리나라는 그럼 뭘 믿고 돈을 빌려야 했나? 또 위안부 팔아야 했나? 전쟁 후 이승만 정부의 경제적 무능함(이승만을 까려는건 아님.)때문에 국민소득이 2자리였던 나라에서 그정도 빌린게 못한 일인가?

또한 박정희 시절의 살인적인 물가상승률을 이야기하는데, 중요한건 실질 경제성장률이다. 고등학교 경제만 배워도 실질성장률이 명목성장률-물가상승률이라는건 알거다. 당연히 그게 -였을리가 없잖아? -였으면 이미 국가재정 파탄나고 남아메리카 꼴 났을 거다.

무역적자에 대해서는 그만큼 해마다 쌓여가는 신뢰가 많아서 돈을 많이 빌릴 수 있다는 걸 뜻한다. 실제로 무역액을 보면 항상 그 전년도의 수입액보다 더 많은 액수를 수출했고, 그것때문에 외국의 기업이 생산공장을 한국에 짓는 게 많아져서 투자된 돈이 자본수지 흑자(즉 수입달러 증가)로 나타난 것이다.

북한하고도 비교하는데, 전쟁 직후 국민소득이 4배차이였고, 전력,공업시설의 90%가 북한에 있었다. 그나마 남한의 시설은 경공업 위주. 심지어 전후 중국 소련으로부터 차관을 북한도 받았다(!) 그거때문에 모택동이 한때 정치적 위기상황이 됐던건 왜 설명을 안했을까? 뭐가 그리 무서웠는지?

아무튼 북한의 전쟁동원령식 개발로 북한도 상당히 고성장을 이룬 건 사실이나 결국 70년대에 따라잡혔다. 현재로 말하면 한국이 2000년에 일본과 국민소득 4배차이가 났는데 이걸 10년만에 따라잡은 꼴. 북한보다 한때 딸렸다는 건 박정희를 더 위대하게 만들 뿐이다. 위의 글쓴이는 혹시 베리웰던 통구이 박정희찬양자인가?←찬양자 드립이나 치고 반박은 못함 ㅉㅉ

중립적 (?) 반박[편집]

일단 애초에 박정희 대통령이 한 일이 엇갈리는 건 맞지만, 따져보자면 국민을 위해 경제 성장을 만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독재자인 것이다. 이런 이면을 가진 사람은 역사에서도 조심스럽게 다루기 때문에 박정희에 대해서도 독재자 친일파 다카키 마사오인가, 아니면 한국을 위해 일한 박정희인가에 대해서는 이념을 통합해 중립적인 의견으로 가야 되는게 당연할 것이다. 다만, 독재를 한다는것 (금지곡 등) 자체는 인권 등 탄압과 관련이 높다. 정리하자면 경제 성장을 이룩했으나 독재탄압자였던 인물이라고 정리될듯. 국제적으로는 독재, 탄압 하는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박정희의 과오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경제성장에 대해서는 거의 이견이 없이 한국을 빈곤의 수렁에서 건져낸 영웅적인 지도자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서 상당수 해외 정치학자들은 아이러니 하게도 박정희의 중산층 양산이야말로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자산이 되었다고 평가하는 편이다. 박정희는 독재자가 맞지만 한편으로는 분명히 위에서 말한 것 처럼 탄압자이기 때문에 역사에서 오랫동안 두고두고 중립적으로 검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정부산하 중정부가 병크를 저지른 일도 굉장히 많다. 뭐 박정희랑 정치적으로 맞서는 인물을 없애려고 했다든지. 그래도 쉴드친답시고 민주주의를 수호한 대통령이었다고 하지는 말자. 이미 군사정변을 시작한 순간부터 민주주의와는 손을 끊었다고 보면 된다.그나저나 이게 중립적 반박이라니

애초부터 민주주의를 떠나서 단기적으로 보면 의료보험 제도 도입, 토지 규제 문제나 수도권 규제 문제나 수도 이전이나 고교평준화 제도 도입등 현재의 좌파들이 좋아할 정책들을 쏟아냈기 때문에 현재로썬 거의 완화가 되는 시점에 있다. 오죽하면 조갑제도 박정희 시절에 정책들을 도입하는걸 크게 찬성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윤보선과 장면 이 두 사람이 너무나도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백범 김구 선생 아들이 김신 장군이 공군의 수장임에도 박정희를 지지하며 함께 쿠데타에 참여할 정도고, 왠만한 군 수뇌부들하나 관리하는게 생각만큼 너무나도 개판 그 자체였다. 뿐만 아니라 윤보선이 대선에 나가서 야당의 포지션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여당의 포지션으로 갑작스럽게 옮겨버린 나머지 집권에 도움을 줬다. 뿐만 아니라 야당에서 이철승을 둘러싸고 사꾸라 논쟁이나 펼치는 추잡스러운 계파싸움과 또한 이철승을 둘러싼 담합 문제까지 이러한 이합집산의 구역질나는 야당의 구태적인 모습들로 견제가 실패로 돌아갔다. 박정희가 잘해서가 아니라 야당의 과거와 똑같은 구역질나는 이합집산으로 장기독재의 길을 마련하게된다. 또한 김구의 아들인 김신 장군을 야당에서 눈뜨고 놓친게 너무나도 컸다. 이철승과 유치송같은 사람들은 그나마 사꾸라 논쟁에 휘말려도 공당화에 기여를 했는데 나머지는 사당화에만 혈안이 된 인간들로 가득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잘나서가 아니라 야당이 그만큼 리얼 노답었다. 이는 소석 이철승 선생이 말하는 장도영 문제로 훗날 야당으로 전략한 장면 내각을 비판한 내용이 있다. 자세한 것은 이철승의 현대사 내용에도 있는데 다음 동아일보에 담은 이철승 선생의 이야기다.

"민주당 정권이 쿠데타로 9개월도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진 이유 중 하나는 군을 전혀 모르고 군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정치인에게 혼란기의 국방장관을 맡기는 등 군과 관련된 인사 실패였다.

나는 일찍부터 안보와 군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3대 국회에 진출한 이후 줄곧 국방위원으로 일해 왔다. 다른 의원들은 재선을 염두에 두고 자기 지역구에 도움을 주기에 유리한 위원회를 택했고 의원 중에는 군대 경험을 가진 사람도 흔하지 않았다. 6·25전쟁을 겪은 대한민국 국회로서는 믿기 어려운 아이러니였다. 문민 우월의식이 지배하고 있는 가운데 군대가 갖고 있는 불만을 몰랐고, 그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고, 짐짓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풍조가 있었다." http://news.donga.com/3/all/20110516/37254127/1

한마디로 군대안간 놈들이 지금 국회의원들보다 훨씬 태반이었던 것이 2공화국이었기 때문에 저런 일이 터지고 그런 놈들이 국방의 요직을 맡았던 것이다. 이게 당시 민주당의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아울러서 리더인 장면의 현 주소이다.

"나는 장면 국무총리가 장도영 중장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하려는 것을 극력 반대했다. 장 총리를 사흘 동안 매일 찾아가 “장도영은 기회주의자이므로 지금 같은 과도기에 기용해서는 안 되고 청렴하고 강직한 최경록 중장이 적격”이라고 건의하자 장 총리는 크게 역정을 냈다. 평안도 출신으로 같은 장 씨였기 때문이었는지 장 총리는 끝내 그를 참모총장에 임명했다. "

장도영은 더구나 군비리로 수사 대상에 오른자였다. 더구나 이철승 선생의 경우는 학도의용군에 참전한 기록이 공식 확인된 기록이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7734386

저것이 우리나라 민주당 총리의 현 주소였다. 무엇보다 장면 내각에선 양반집 아들내미들이 그렇게 넘쳐남에도 6.25전쟁때는 자기가 직접 나서서 학도의용군을 조직에 돈을 보탠다던지, 자기들도 목숨걸고 싸우긴 커녕, 6.25때 싸우던 국군을 위해서 돈 한번 기부안한 인간들이 너무나도 넘쳐났고, 자기들이 돈 털어서 그들을 돌볼 생각따윈 죽어도 안했던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 정부를 맡기고 싶은지 물어보고 싶다. 그래놓고 이승만 정권에게는 독재정권이라고 말하며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정권에게는 정통성이 없다는 소리나 깐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사고 방식을 그대로 가지는 인간들이 나라를 이끌 것이라고 보는가? 실제로 이런 분위기가 너무 싫어서 야당이었던 삼연 곽상훈 선생조차도 군정에 가담했다.

엽색 행각[편집]

사생아 존재 의혹까지 있는 그 김대중조차 몇 십수는 접어줘야 할 만큼 여성 편력이 문란하기로 유명했다. 군인 시절에도 기방을 밥먹듯이 드나들었고, 심지어 비구니를 겁탈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이는 남로당 경력과 더불어 박정희의 군 생활을 위태롭게 한 큰 요인 중 하나였다.

대통령 재임 시절에도 이는 달라지지 않아 육영수와 여성 문제로 바람 잘 날 없이 싸웠다. 육영수의 얼굴이 시퍼렇게 멍이 든 적도 있으니 가정폭력도 일삼은 모양.

육영수가 문세광의 흉탄에 저격당한 뒤로는 안 그래도 심했던 엽색 행각이 더더욱 심해져 한 달에 평균 소행사 8번, 대행사는 2번씩 가졌다고 한다. 여기서 대행사란 여인 두 세명을 끼고 중정부장이나 각 부 장관 같은 고위관료들과 함께 정책에 대해 논하거나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고(단란주점 같은 거라 생각하면 편하다), 소행사는 박정희가 여인 한 명과 함께 단 둘이서만 은밀히 즐기는 행사였다고 한다. 이 소행사에는 항상 박정희와 딱 달라 붙어다니던 경호실장 차지철도 대동하지 않았다고 하니 이 소행사가 뭘 하는 것인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또한 박정희가 죽던 그 순간 박정희는 바로 대행사 도중 죽었는데 그때 박정희와 스킨쉽을 하러 갔던 모델 신재순과 박정희 앞에서 노래를 부르러 갔던 가수 심수봉은 본의아니게 박정희가 죽는 순간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쓰리꾼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자 전두환은 이 두 사람을 연예계에서 추방했다. 이에 심수봉은 가만히 있다가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이후 추방에서 풀려나 다시 가수가 되었지만 신재순은 추방당하는 순간 미국으로 이민갔다.

미모는 신재순이 심수봉보다 훨씬 뛰어났다. 이것은 심수봉한테는 비밀로 해야 한다. 심수봉이 알면 삐진다. 아래는 엽색 행각 목록들이다.

  • 김호남(딸ㅡ박재옥)
  • 이현란
  • H아파트사건
  • 국군 간호장교 추문사건
  • 새마을 어머니 배구대회 추문사건

이외에도 김모양, 안모양, 정인숙들이 있었다 카더라

반박[편집]

하지만 김호남에 대해서는 반박을 해야겠다. 김호남은 오히려 박정희가 싫어하는 여자였는데 가문에서 강제로 결혼시킨 거였고 박정희는 하기 싫은 결혼생활을 억지로 한 것이였다. 결국 한국전쟁이 발발해서 난리가 난 틈을 타서 박정희는 김호남과 이혼하는데에 성공했다. 박정희는 중령에 진급한 직후 김호남과 이혼했다. 비구니 강간썰은 곽영주 이 색히가 박정희 진급 못시켜고 만든 거.

그리고 소행사, 대행사 운운하는것은 전부 김재규와 그 똘마니 박선호의 증언인데 자신들의 범죄를 정당화하기 위해 구라를 쳤을 가능성도 염두해야한다. 애초에 그 일 이후로 몇십년이 지났는데 제대로 된 정식 증언자가 한 명도 안 나온다는 그 자체가...? 상식적으로 박정희도 뒈진지 몇년이 지났는데 뭐가 무서워서 박정희가 자신을 강간했다는 사실을 얘기못하겠는가. 검증이 안 된 소설일뿐. 게다가 그 사이에는 박정희와는 불구대천지원수로 악명높은 김대중이 대통령을 한 적이 있기까지 했는데 그때에조차도 증언하는 이가 나오지 않은 것은 뭔가 좀 이상하다.

진신류들의 반박[편집]

솔직히 천조국이 반공한답시고 쏟아부은 돈이 얼만데 통정희가 경제살렸다는 개소리가 나오냐? ㅋㅋㅋㅋㅋㅋ 솔직히 아주 씹병신아닌이상 그렇게퍼주고도 성장안하는데 더 이상하다.

반박[편집]

진신류 이 양반들은 뭐하시는 분들인지 잘 모르겠는데 ㅋ 미국이 원조해준 30여개국 중 우리나라보다 잘 살거나 경제성장률이 높았던 나라는 없음. 근데 왠 천조국 타령임 ㅋ

반박을 위한 보론[편집]

남베트남이랑 필리핀에 퍼준 돈이랑 무기가 얼만데 그런 헛소리가 나오냐? 어그로로 홈런칠 각이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돈을 얼마를 퍼줬는지도 모르는 진신류님들 최소 개그맨 아니냐? 일방적으로 지원하는 비용이랑 담보차관이랑 구분 안 하고 그냥 일방적으로 해도 남베트남보다 적은데 무슨 염치로 개소리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현재의 교육제도도 박정희 정권때 기초교육제에서 약간 변형된 수준이고 그 이전 교육제도랑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데다 경제기획원 중심 경제기간 정책의 성공과 중국이나 빈곤국가들의 모범이 된 게 오죽하면 논문으로 나왔는데 무슨 염치로 안보인다 안들린다 시전하는지 모르겠네. 1970년대 이후에는 반공한다고 돈 쏟아붓는 행위도 없어졌는데 뇌내망상 좀 적당히 해라

우디르급 태세변환 사상 문제[편집]

위의 만주국 군관과 남로당 경력 등으로 볼 때 박정희는 특별한 신념이 없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로 보일 여지가 충분하다. 남들은 하나만 저질러도 모가지가 달랑달랑했을 일을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까지 합쳐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그냥 기회주의자였으면 그려러니 하겠지만 일제시대와 북괴의 침공으로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지도자로서 이러한 경력은 문제의 소지가 다분하며, 그들이 그토록 5.16 혁명이라고 부르짖던 5.16 군사정변의 정당성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거기에 자신의 저서인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는 그 악명높은 아돌프 히틀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까지했다.[17] 이는 일국의 지도자로서 절대로 가져서는 안 될 매우 위험한 사상이며, 만약 임기 말까지도 박정희가 이런 사상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자기한테 인사 안했다고 야밤에 야당의원 집에 찾아가서 구둣발로 걷어차는 짓들을 저질렀던 행위 때문에, 여야 모두에게 까이고 군 시절에 봤던 후임 마누라가 이쁘다고 건드려서 사생아들까지 만들었던 주제에 발터 한 방으로 민주화투사가 된김재규의 말대로 부산과 마산이 캄보디아처럼 쓸렸을 게 분명하다고 주장모택동 존경했다고 일베충들한테 까이는 노무현은 쨉도 안 되는 우리 원조가카^^하는 찐따들이 있는데 박정희 정권 시기에 그런 진압은 없었다. ↙↙↙↙↙↙↙↙↙↙↙↙↙↙↙쪽에서 엔두와 박정희도 구분 못해서 나오는 기초적으로 연력구분을 못해 나오는 대뇌피질 오류 차원의 문제니까 넘어가자. 주체교 주신 성주甲의 갑산파를 비롯한 계파와 그 가족, 친척 숙청이 갑산파 20만명을 시작해 백만에 육박했던 것을 생각하면 진신류 님들은 이런 말씀을 절대 안 하시고 메카시즘으로 왱알왱알하신다.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반박[편집]

그런 식으로 치면 장택상 밑에서 꼬봉짓하다가 실컷 정적으로 싸우다가 JP와 손잡고 DJP연대를 맺은 김대중은 무엇이며 대기업 재벌과 손잡과 후단협을 하고 더 나아가선 박근혜에게 대연정 제안을 했던 노무현은 무엇이며 그렇게 정적이었던 장택상 밑에서 꼬봉짓하다가 노태우와 김종필과 3당 합당을 했던 김영삼은 무엇인가? 우디르급 태세전환? 당적 5번 이상에 빛나는 민주 세력이라는 자들의 우디르급 태세전환은 무엇인지 듣고 싶다. 김영삼의 측근 중에선 윤여준이라는 5공 인사도 있었고 김대중의 경우는 김중권이라는 5공 인사도 있었으며 노무현의 경우는 군사정권때 출세길을 걸었던 이용훈 대법관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외교부 장관으로 뽑힌 현 유엔사무총장인 반기문은 5공 정권과 관련해서 DJ의 동선을 까발린 양반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2965063 더 웃긴건 노무현이 김선일 참수와 관련해서 여야 모두 해임을 요구했지만 쉴드를 쳐가며 반기문을 지켰다. 이것도 우디르급 태세 전환이라면 태세전환이다.

하지만 당사자들이 하는 말은 화합이요. 예우라는 되도 않는 헛소리를 지껄여댄다. 군사정권에 반대하고 한일협정에 반대했던 이명박조차도 국보위 출신의 한승수를 총리로 올리려다 욕을 먹었다. 인수위원장도 국보위 출신이었다.

측근 문제[편집]

현 박근혜 대통령의 측근 참사의 원인은 아버지인 박정희의 측근 참사에 영향력을 많이 받았다는 썰이 있다. 참고로 독재자이기 때문에 측근의 방종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컨트롤을 하지 못했는데, 김형욱김재규가 그 대표적인 예로 해먹을거 다 해먹으면서 두 사람 모두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을 결정했고, 차지철은 원조가카가 총 맞자 도망쳤다. 반대로 김종필의 경우는 오히려 견제가 너무 심각해서 대도 조세형이 김종필 집에 쳐들어가서 털게 없었다는 썰이 있었다. 이는 보수의 분열을 낳은 결정타를 낳게했다. 그래도 김종필은 측근으로써 한때 아끼기도 했다. 사실 측근 문제는 역대 대통령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반박[편집]

그래도 박정희 정도면 측근 문제에서 대단히 선빵친 것이다. 이승만의 측근이 어떤 개씨발좆같은 찢어죽여도 시원찮은 개씨부랄놈의 새끼인지만 알아도 이것은 완벽히 해명된다. 이승만은 측근을 잘못 둔 죄로 4.19 혁명을 통해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국민에 의해서 쫓겨난 대통령이다. 그 병신같은 곽영주새끼에 비하면 김재규도, 김형욱도, 차지철도, 김종필도 성공한 측근이라 단언할 수 있다.

재반박[편집]

아무리 곽영주라는 인간 쓰레기같은 측근들을 이승만같은 건국 가카가 두었어도 원조 각하의 측근 문제도 김형욱 같은 측근들을 둔것만 봐도 대단한 선빵을 친것도 아니다. 그나마 유일하게 잘둔 측근이 김종필이었다. 그 김종필도 DJP연대에 낚였다. 이승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성공한 대통령들은 단 한명도 없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국민들에게는 이제까지 대통령들은 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평가를 하고 앞으로도 대통령을 뽑아봐야 다 거기서 거기라고 한다. 물론 국회도 마찬가지다.

재재반박[편집]

대가리 똥통에 빠진 소리가 튀어나오는데 괜히 김훈과 강용석이 아직도 우리는 박정희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한게 아니다. 임금불평등과 복지 문제를 두고 [18] 김종인, 녹화사업을 해서 영토 중에서 30%가 녹지던 국가가 70%가 녹지인, 그것도 타이가 숲 뺨치는 녹지로 만든 손수익과 고건 등이 이 시기 출신이다. 선빵급으로 측근 잘뒀어야 한다면 워치킹 노오오오오오오오오무현 만큼은 잘 둬야 하지 않을런지

재재재반박[편집]

노무현 당시에 측근들이 그 유명한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된 것만 봐도 답이 나올 것이다. 성완종 특사때도 가관이었다. http://blog.naver.com/smartguy68/220332319982 노무현에 대해서는 추가로 반론을 하고 싶기에 적는 것이다. 사실 측근 논쟁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별 의미는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철승 선생 집에 불이나 질러서 일가족 모두를 죽일려고 했던 김형욱이 같은 배신자를 측근으로 둔거는 박정희 대통령의 명백한 실수다. 흡사 조응천같은 인간을 측근으로 둔 박근혜처럼 말이다.

고교평준화 문제[편집]

사실 이건 진보 세력들보단 보수 세력들이 우려하는 것 중에 하나로 사립학교의 불리함과 경쟁력 악화를 낳게된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사실 당시에는 지금같은 전교조와 같은 집단들이 없어서 추진을 했지만 지금 고교평준화를 더 심화시키면 전교조만 좋아할 일이다.

당시에는 교육서비스 확대를 위해 실시했다곤 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성을 가지고 있다.

의료보험 도입 문제[편집]

당시에는 의료서비스를 확대하기 위해서 추진한 정책이지만 지금은 수가 문제나 공단의 배만 키운 것이기 때문에 단기적으론 훌륭했을지 몰라도 장기적인 안목이 떨어진 정책이었다.

참고로 그 의료보험공단을 만든게 김대중이인데 박정희가 했던 의료보험의 연장선으로 의료보험공단을 쳐만들었다. 결국 쓰잘데기 없는 흑자파티 기록중이다.


근데 웃긴게 민주계나 진보들은 이런 것에 대해서 별말안하고, 오히려 도입만했고 실천하지 않았다는 말만 늘어놓는다. 뭐하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새마을 운동[편집]

새마을 운동은 흔히 농촌을 개발하기 위해 근면,자조,협동 정신을 깨우기 위한 운동이었다고들 한다. 이것만 보면 참 좋은것 같다. 그러나 농촌이 몰락하는 배경을 알지못해서 이런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로 농촌의 경재활동가능인구[19]가 빠져 나갔다. 그래서 농촌에는 일손이 부족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저임금을 유지하기위해 저곡가정책을 썻다. 그래서 농사를 지어도 이윤이 남지 않았다. 그래서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가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났다. 마침 기업에서 시맨트를 너무 많이 생산해서 적자위기에 처해있었다. 이때 박정희는 농촌에 시맨트를 제공해줘서 기업이 적자가 나는것을 막는것과 마치 자기가 농촌을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얻었다. 그런대 어디 공짜로 제공해주리? 전부 대출해준것이다. 이런식이다 보니 5배의 수익상승과 22배의 부채증가를 안겨주었다. 참 잘했어요^^

그러나 위의 말은 신빙성이 없으며 새마을운동이 전세계적으로 국가경제를 발전시키는 제도이자 가난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특효약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지금도 나이지리아, 콩고, 카메룬, 수단, 차드, 르완다 등의 아프리카 국가들과 미얀마, 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주요 공무원들이 대한민국을 방문해서 새마을운동을 배워간다. 실제로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새마을 운동이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일단 유엔사무총장이 반기문이라는 건 넘어가자. 그 정도로 전세계적으로 크게 인정받고 있는 것이 새마을운동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새마을운동을 푸대접하는 나라는 아이러니하게도 새마을운동의 종주국이라는 점이다.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농촌에 재공한 시멘트를 얼마나 아낌없이 사용하느냐로 성적을 매겨서 최대한 많이 사용한 동네에는 큰 상을 내리고 시멘트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동네에는 벌을 내렸다. 새마을운동의 내역은 다음과 같다.

  • 건물의 최신화 - 초가집을 죄다 헐고 그 자리에 현대식 주택을 지었다. 이를 위해 박정희는 시멘트를 대량으로 사다가 무상으로 나눠줬다.
  • 토지개발 - 농토를 최대한 넓혔다.
  • 경부고속도로 개통 - 고속도로를 개통함으로서 운송물량을 증대시켜서 국가경게의 기반을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새마을운동을 전세계에서 경제가 좀 부실한 나라들에서 배워간 뒤 자기네 나라 국토와 경제를 개발시키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으며 효과도 짭짤했다. 하지만 정부가 다해먹는 방식의 새마을운동이라는 이유로 민주주의의 기반을 다지는 데에 부정적인 영향이 생길 수도 있다며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담이지만 박정희가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할때 윤머중과 제갈머중 두 형제가 나란히 서서 반대시위를 했다 카더라.

반박[편집]

정말 농촌을 지붕만 바꾸고 둑이나 하천을 조금 고쳤다고 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것은 아니었다. 박정희 정부때는 18년 내내 저곡가 정책을 유지했다. 다시 말해 농사를 지어도 수익이 남지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뭐하러 농사를 짓겠는가? 식량원조도 받는데책 홍보 하는건 아니고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1970년대편 새마을 운동 부분좀 읽어봐라 박정희는 기업들이 사채때문에 힘들다 하면 사채까지도 동결해주지 않았는가? 새마을 운동이 우리나라 경재에 도움되었다는 말은 순 거짓말이다.

반박의 반박[편집]

강준만이라는 위인이 이미 악질 이승만 빠돌이이다. 그런 사람이 쓴 책따위를 믿으라고? 더군다나 강준만은 백범 김구를 개새끼라고 평가한 위인이다. 강준만은 나관중과 더불어 역사왜곡의 양대산맥이며 강준만이 살아생전에 한 모든 말은 순 거짓말뿐이다.

재반박[편집]

그렇다면 추후에 벌어진 IMF사태라든가 대한민국의 빈부격차가 매우 큰 것에 대해서 새마을운동이 중앙집권적인 경제개발이라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강준만이 쓰레기인 점은 넘어가고 새마을운동의 부작용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재벌 혼자만 잘살고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죄다 가난한 나라를 선진국이라고 볼 수 있는가?

그리고 강준만이 이승만빠? 좀 쌩뚱맞다. 오히려 강준만은 송진우나 김대중을 더 추켜세우지 않는가? 그래서 김대중의 열렬 지지자였고 그래서 한민당에 더 우호적인 사람이 아니였던가? 참고로 고하 송진우를 영웅으로 재조명시키는데 한몫을 했던 사람이 다름아닌 강준만 선생이며 한민당을 마냥 친일파 정당으로 만들지 않은게 강준만이다. 이승만빠라는건 쌩뚱맞다.

재반박의 반박[편집]


지랄한다. 대한민국이 재벌 혼자만 잘살고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죄다 가난한 나라라는 전제부터가 틀려처먹었다. 니가 앰창인생 가난한 흙수저라고 해서 남들까지 다 너같을 거라 생각하지 좀 마라. 난 재벌과는 당연히 비교할수 없지만, 그래도 가난하다는 소리를 들을만큼은 절대 아니니까. 내 친구와 친척과 이웃들도 대부분 가난하다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다. 대한민국 자체가 아무리 헬조센헬조센 거려도 국민 대부분이 가난한 나라는 절대 아닌데 흙수저 새끼 물귀신 작전 ㄴㄴ

재벌 혼자만 잘살고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죄다 가난한 나라라고 하는데 그럼 공산국가로 가서 모두 나눠먹고 살던가. 그럼 그 당시에 대기업을 기르지 중소기업을 기르나? 과거 중소기업 기른 대만꼴과 우리나라 상황을 비교해봐라. 둘 다 썩 좋은 상황은 아니다만, 그래도 우리나라가 낫지 않나?

IMF문제나 지금의 빈부격차 문제를 박정희 탓으로 전부 돌리는 것은 무리가 있다. 물론 朴정권 아래에서도 다소 경제적인 문제가 있었지만, 그게 전부 朴정권아래서 일어나 그 문제가 지금까지 계속되어온것이라면 80 - 90년대의 경제적 부흥은 당시 삼저호황등 세계경제상황을 두고 본다 해도 설명되지 않는다. IMF는 전적으로 문민정부의 외환보유고 관리의 실패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지금의 빈부격차도 마찬가지. IMF전만해도 지금처럼 빈부격차가 심하지 않았다.

IMF나 지금의 빈부격차 문제는 오히려 03이 탓하는게 나을듯.

진신류의 반박[편집]

아직도 새마을운동 옹호하는새끼도 있네 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유네스코세계유산등록은 그 사건 기록의 가치지 그 사건의 가치다 아니에요 병신 박통진리교새끼들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시발 차라리 독재자였어도 우고 차베스같이 서민들을 위한 정치했으면 까지도않지 재벌이라는 괴물집단을 만든새끼가 통정희인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거기다 쿠데타 초반에 자신을지지하던 호남사람들도 버리고 호남은 대구와 목포 비교하면 나오듯 박정희정권댸도 발전못함.

지나가다의 반박[편집]

새마을 운동 비난하는 새끼들 중에서 99%가 헬조선인과 부카니스탄인. ㅇㅈ? ㅇㅇㅈ 그리고 UN에서 하고 있는 빈곤퇴치 사업 중에 10년 넘게 한 것 중 약간이라도 성공한 것들이 얼마 안되는데 새마을 운동이 가장 성공한 사업 중 하나. 응? 이거 최소 박통진리교 신자들과 일루미나티 음모 아닌가요?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우고 차베스도 모사크 폰세카를 통해 차명계좌랑 비밀계좌 존나 만들어서 국가재산을 자기 명의로 빼돌림. 박정희는 노무현이 집권기간 동안 과거사 화해 드립을 치면서 털었는데 여자문제도 제대로 안 나옴. 그리고 우고 차베스도 재벌 만들어냄.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좆무식 좆진신 사스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룰라도 비리 오지고 쿠바도 카스트로 형제 비리 오짐. 엥? 박정희? 에에에에에엥???? 머가리 최소 장식품 아니냐?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호남이 지지 엎은게 신민당 약진 이후인데 그 때 전라민국 현인신이 아마?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박정희 정권 대 중반까지 가장 경제적으로 이득본게 호남인데 이게 농업생산에 기초한 경제구조였기 때문. 그리고 공업화가 착착 진행되면서 경제적 이익 비중은 날이 갈수록 떠어어어얼어지이이이이인드아아아아아아. 이와 함께 계속 개소리하시는 좆진신들을 위해, 전라민국의 국부님이 경부고속도로 짓지 말고 고구마와 옥수수 종자 사오자던 말을 생각해보면 각이 나온다.

[고구마&옥수수 vs 포항제철&경부고속도로]로 각을 잡고 대가리를 굴려봐라.

이승만과의 관계[편집]

박정희는 애초에 이승만과 사이가 매우 나빴다. 그 단초라는 게 박정희가 육군본부 정보국 문관으로 백의종군하던 시절인 1950년 6월 23일에 김종필과 같이 북한군의 움직임이 수상하니까 대응해야 한다고 보고했지만 이를 씹은 게 이승만이었고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결심했지만 쿠데타가 북한놈들만 좋은일을 시키는 거라며 반대하는 원용덕 등의 만류로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을 단념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에 박정희는 이미 준장이었고 보직은 6군단 부군단장이었다. 이때 박정희는 소장진급심사에 올랐는데 곽영주가 나타나서

저 빨갱이 새끼는 진급시키면 절대 안됩니다!


라고 외치며 박정희의 진급을 막았다. 하지만 당시 국방부장관인 김정렬이 자기가 모든 책임을 질테니까 진급시키라고 말하며 보증을 서줘서야 겨우 소장에 진급했다. [20] 이후 4.19의거로부터 한달 뒤 박정희는 군사정변을 일으켜서 정권을 차지했는데 이 과정에서 자신을 도와준 두 명의 대위인 전두환차지철을 자신의 최측근으로 삼게 되었다.[21] 그리고 박정희가 정권을 잡은 직후 제일 먼저 한 행동이 혁명재판이라는 이름으로 곽영주 등 이승만의 떨거지들을 모조리 청소한 행동이었다. 서로가 못잡아먹어서 안달인 박정희와 이승만 두 사람의 갈등과 대결은 박정희의 승리로 끝났다.

퇴임[편집]

박정희는 1981년 10월 1일 국군의 날 열병식을 마치고 곧바로 퇴임하기로 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 민주주의를 되돌려주고 자신의 당에서는 김종필을 출마시키기로 했다.

위의 민정이양 떡밥은 박정희가 5.16쿠데타 때부터 씨부렸던 유서 깊은 거짓말 중 하나이며, 심지어 그의 심복 김재규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 박정희의 태도에 같은 군인으로서 수치심과 배신감을 느낄 정도였다. 고로 박정희는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해먹으려 했고 죽은 후 그 자리를 차지철같은 자신의 심복이나 박지만에게 물려주려 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그런데 실제로 박정희가 죽자 그 자리를 전두환이라는 이름의 심복이 물려받았다.

하지만 김재규 역시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을 때리고 한때는 해처먹었던 인간 중에 하나로 김형욱과 다를게 없던 인간이다. 뿐만 아니라 김종필의 경우를 출마시키려고 했고, 그래도 한때는 자신의 5.18쿠데타에 계획을 주도했던 것이 김종필이자 박지만의 경우는 마약복용의 혐의로 도덕성에 엄청난 흠이 갔고 차지철조차 원조가카가 총을 맞을때 36계 줄행량을 치다가 총을 맞았다. 박정희 본인도 아첨한 인간들이 그다지 썩 좋지는 않다는 것이다. 저런 말들이 형식적이긴 하지만 박정희의 심정도 엿볼수가 있다.

그리고 이철승과 박정희와의 영수회담때 박정희 정부는 내각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수긍을 하려고 참모들에게 물어봤는데, 참모들이 대부분 반대해서 무산되었다고 한다. 내각제의 경우도 일종에 의회민주주의를 통한 민정이양이었다. 내각제를 할 경우에는 박정희 대통령은 권한도 없는 명예직으로 남기고 후일 최규하, 전두환, 김종필, 이철승 선생이 실질적 리더로 남겠다는 계산을 깔았다는 것이다. 성사가 되는 즉시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은 피할 수 있었고 의회민주주의가 성립된다는 계산이었다. 쉽게 말하면 독일식 내각제를 받아들이자는 것이자 이철승과 연이 있었던 김종인이 총리도 될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한가지 단점이라면 독일식 내각제가 연방정부를 통해 내각제를 추진하자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독일과는 달리 연방정부를 꾸린 경험이 없으며 땅도 독일보다 몇배나 적다. 우리가 말하는 지역구 국회의원들도 사실상 지방자치의 일종이다. 그래서 독일도 그 폐단을 막고자 비례대표제를 도입시켰다. 그리고 한국에서 내각제의 가장 큰 취약점이 지금 당시나 지금의 국회가 국민들에게 큰 신뢰는 없었다. 오죽하면 국개의원이라는 말이 병역면제자들이 1/4 수준인 지금도 붙을까?

피해자[편집]

대부분 그 시절에 무시무시했던 중앙정보부에게 잘못 보이다 당했다.

  • 이승만의 졸개들 - 곽영주, 최인규, 꿀돼지 등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이승만의 빵셔틀짓거리를 하다가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하자 깨끗하게 청소당했다. 애초부터 박정희와 이승만은 척을 진 사이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 김영삼의 자가용 차 - 질산테러를 당했다.
  • 김대중 - 해외에서 납치되어 죽을 뻔함. 쩔뚜기가 됨. (지팡이가 왔다갔다 거려서 연기라는설도 있음. 항상 의혹이다.
  • 윤보선 - 5대, 6대 대선에서 윤보선이 이기면 윤보선을 죽이려고 중앙정보부 요원이 대기했다고 한다. 중앙정보부 직원 김모씨 등의 폭로에 의하면. 윤보선은 주한미군 사령관이 보낸 요원들에 의해 아프다는 핑계로 병원으로 갔다가 병원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주한미군은 기밀을 위해 윤보선의 비서 김준하에게도 비밀로 했고, 애꿎은 김준하만 난타당했다.
  • 장준하 - 독립운동가 출신 국회의원. 박정희 타도 계획을 세우다 암살당했다. 사인은 두부외상. 누가 죽였는지는 며느리도 모른다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정이 저지른 일이라 보고 있다.
  • 김형욱 - 전 중앙정보부장. 중정부장 시절 박정희 응딩이 뒤에서 나대다가 토사구팽 당한 뒤 미국 형님 밑으로 들어가 그동안 박정희 정권 하에 이루어진 만행을 전부 고자질했다. 이에 빡친 박정희가 보낸 중정요원들에 의해 분쇄기에 갈려 닭모이가 되었다는 설도 있고, 머리에 총맞고 죽었다는 설도 있다. 확실한 건 그를 암살한 배후세력이 중정이라는 것.
  • 윤필용 - 주둥이 잘못 놀려서 숙청당했다. 가만히 있는 이후락한테 "가카가 뒈지면 님이 대통령인 거임"이라는 소리를 했다가 사오정 기질이 있는 박정희가 이걸 "후락이 형, 형이 정희를 죽이고 대통령 해라"로 알아듣는 바람에 박정희한테 숙청당했다. 윤필용 사건 항목 참고.
  • 이철승 - 장면 총리와 관련해서 군 장성들 임명 문제로 실컷 싸우다가 졸지에 5.16이 터지자 국방부 장관으로 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나 중앙정보부에 인해 암살당할뻔했던 인물로 해외에 가서 여권이 박탈당해 졸지에 불법체류자가 된 인물로 미국으로 갔는데 어떻게 미국에 갔는지는 모른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딸인 이양희와 자신의 아내인 김창희 여사가 이 시절 의문의 테러를 당해 다 타죽을뻔했다고 한다. 물론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서 진짜 진범이 누군지 알수 없었으나 증언에 따르면 그 짓거릴 했던 놈은 김형욱이었다고 한다.
  • 박정희 - 중앙정보부장 김재규한테 저격당했다(대한민국 1호 벌집핏자)

신으로 추대되다[편집]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22]

전라민국에서 김대중이 신이라면 개쌍북도에서는 박정희가 신으로 추대된다. 고박정희대통령각하를 다시 한번 매도한다면 너는 노릇노릇 구워질것이다.

오해[편집]

모든 경상도에서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아니며 구미시, 성주군, 대구시 일부 지역에서 특히 그를 숭배한다.[23] 구미 근처 칠곡군은 박정희의 정적인 장택상의 고향이라서 이 지역에서만큼은 박정희를 높이 치지 않는다.[24] 포항은 왜빼먹니

또한 1960년대~1970년대 김영삼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던 거제도, 부산, 마산, 창원, 진해울산 일부 지역에서도 박정희를 혐오하는 일이 더러 있다. 경상도라고 모두 박정희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아니니 경상도라고 무조건 박정희 티셔츠 입고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한 짓이다.[25]

전라도는 김대중이 97% 득표율을 받는 신이지만 경상도 전체가 박정희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쨌든 그렇다는 것이다.

기타[편집]

박정희 정권 시절 장관이 된 양반 중에 김신이 김구의 아들이 있는데 아직까지도 미스테리로 남는 인물 중에 하나로 그는 유신정우회 멤버로써 김구 선생의 미화에 박차를 가한다. 이유는 아버지 문제와 박정희 문제와 관련된 여순반란으로 두 사람이 손발을 예전부터 맞춘 썰이 있다. 더구나 장면정부의 차별화를 통해 고하 송진우가 격하되고 그리고 안공근 사건은 안공근의 어리석음으로 폄하되기도 했었다.

더구나 김신은 최용덕과 함께 대한민국 공군의 전설이자 최용덕의 뒤를 이은 공군의 리더이자 최용덕 장군으로 시작한 대한민국 공군 사업에 초기기틀을 완성시켰다. 이런 사실을 보자면 황당하기 그지 없고 516에도 참여했던 516 공신이다.안춘생도 그 유명한 안중근 후손으로 유신정우회에도 가담했다.

뿐만 아니라 여운홍은 여운형의 동생으로 민공당의 고문이 되었다. 씨발 진짜 이쯤되면 온갖 좆털론이 다 나올만큼의 인사기용들이었다.아무래도 여운홍은 남로당 경력을 숨기고자한 의도가 컸다고 본다.

참고로 왜 이런 일들이 생겼냐면 김신 장군의 경우는 장면, 윤보선, 장택상의 경우는 선친인 독립운동가였던 김구가 그렇게 썰어버리려고 했던 인물들이고, 더구나 장덕수와 송진우 선생과 관련된 문제로 야당에선 그를 반길 사람들이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야당 내에서도 독립운동가였던 삼연 곽상훈 선생이 야당을 이탈하고 군정에 가담하여 여당 정치인이 될 만큼 야당은 그야말로 총체적 위기였다. 그 반민특위에 멤버였던 삼연 곽상훈 선생조차도 여당에 가담할 정도면 당시 야당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갈 지경이었다.


이러한 인사들을 뽑았음에도 야당에 그 어느 누구도 비판을 못했다. 특히나 김신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때는 이철승과 더불어 반공 시위를 주도했다. 그러다가 김양 보훈처장의 방산비리혐의 서거로 다시금 김신 전 장군의 양면의 모습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그리고 야당 성향에 인간들이 박정인 장군을 띄우기 위해 박정희를 깠으나 정작 백린탄으로 북괴군 몇십여명을 골로 보내고 김창룡 장군의 남로당 숙청 운운하며 감창룡 장군을 추켜세우자 자기들끼리 웃지못할 키배가 벌어졌다. 확실한건 박정인 장군 해임 문제는 박정희 대통령 본인 책임이다. 단 야당 내에서 지적을 하지않는 것은 평시작전권이고 대통령이고 나발이고 씹어먹고 북괴군 몇십여명을 골로 보낸 엄청난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몰라서 그렇지 박정인 장군 해임 문제도 여권 지지자들 내에서도 논란이 뜨겁다.

술게임에 약하다 카더라. 특히 공공칠빵과 탕수육 게임을 못한다고.

박정희빠[편집]

  • 박근혜 - 이 분야의 전설 오브 레전드이며 박근혜보다 더한 박정희빠는 절대로 존재할 수가 없다. 사실 박정희빠가 되어야 할 의무가 있는 위치의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 김종필
  • 전두환
  • 차지철
  • 허경영
  • 기타 저개발국 국민들
  • 이영작
  • 황장수
  • 김지하 - 사실 가장 충격적이고 쇼킹한 사람 중 하나로 죽고나서 박정희빠가 되었다.
  • 김경재 - 이 사람은 김형욱 회고록이라는 글까지 쓰면서 박정희의 정치적 생명력을 갉아먹었지만 박정희 시대에 산업화는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 이정현
  • 김신 - 김구 선생의 아들로 박정희 시절에는 측근 중에 한사람으로 꼽혔다. 유신정우회에도 가입했다 ㅎㄷㄷ
  • 김기춘 - 박정희 시절 문세광 사건을 수사해서 신임을 얻기 시작해 박정희 정부 시절에는 청와대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 박태준
  • 정주영
  • 안춘생 - 유신정우회에 멤버로 그의 조상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이었다
  • 곽상훈 - 원래는 야당 소속에 인물이고 독립운동가이자 반민특위의 멤버였는데, 야당의 지저분한 계파싸움으로 여당으로 돌아선 인물 중에 하나이다. 육영재단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출세의 가도를 달렸다.
  • 등등 기타 친박들

박정희까[편집]

근데 사실 문재인이나 안철수가 묘소에 참배한걸 보면 까면서도 정작 욕먹으면 아무것도 못함 문재인이나 그 빠인 문베충들이나 안철수나 그를 지지하는 간잽이충들이나 다 그렇지.

같이 보기[편집]


  1. 그러나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은 일본 육군 인물 사전에 나와있다. 일본놈들이 뭐하러 지네 딴에 위대한 일본군을 왜곡하겠는가?
  2. 오카모토 미노루는 그의 대구사범 당시 행정실장의 이름으로 밝혀졌다. 이는 2011년 어느 네티즌이 대구사범고 동창인 김병희 박사 등 몇명에게서 대구사범 졸업앨범을 입수해서 밝혀낸 것이다.
  3. 공공칠빵을 너무 하다가 게임 중독으로 죽었다는 설도 있다.
  4. 박정희 좋아하면 수꼴이고 싫어하면 좌빨이라는 뜻은 아님
  5. 별 병신같은 소리를 다 본다는 생각이 드는 드립. 당시 기록이나 제3공화국 드라마 제작팀의 인터뷰 등을 보면, 이 개소리와 반대되는 내용들이 수두룩하다.
  6. 이 중 8천만달러를 제철소 짓는 데에 썼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포항제철(現 posco).
  7. 개소리. 이 내용을 두고 반년동안 국가가 시끄러웠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들을 보면 난리가 아니다.
  8. 원래 제철소 건립 비용은 KISA(Korean International Steel Asociation)에서 분담하기로 했으나 미국과 IBRD(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가 한국에서의 제철산업은 이익이 없고 기술도 없으니 포기기하고 기계공업이나 하라고 했는데 이는 한국인을 깔본것이다.
  9. 원래 신성모를 국방부장관에 임명했으나 막상 전쟁이 터지자 신성모는 작전지휘는 커녕 질질 짜기만 하고 자빠졌으니 이승만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븅신띨빡새끼를 짜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국방부장관은 김정렬로 교체되었다.
  10. 3s정책 이라던지 88올림픽 이라던지
  11. 참고로 부친인 사토 히데스케의 본성은 기시씨인데 처가 성씨를 따라서 사토씨가 되었다. 그러나 기시 노부스케의 경우, 백부에게 아들이 없어, 사촌인 기시 요시코와 결혼해, 본가의 성씨를 이어서 다시 기시씨가 되었다. 동생이 사토 에이사쿠고 외손자가 아베 신조다.
  12. 정확히는 이것도 오류. 원래 박정희가 태어난 곳과 다닌 학교들이 있던 곳은 후쿠시마 출신 일본인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원래 후쿠시마 원방언의 경우, 일본어문학자들에게 상당한 난이도가 있다. 박정희는 당시 저런 내용을 후쿠시마 방언으로 이야기 했고 당시 참석자들의 경우, 원충연이나 최덕신을 제외하고는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당시 요미우리 등의 일본 신문도 기사화할 정도였다. 거기다가 당시 박정희가 다닌 모교의 교장이던 히라야마 다다시와 스승이던 기시 요네사쿠의 경우, 기시요네사쿠의 회고록을 보면 일본어 대신 한국어를 쓰려고 했었으며, 박정희는 사제관계 차원에서 기시 요네사쿠가 자신에게 각하라는 표현과 한국어 사용을 두고 어려워 하며 스승님 이러지 마십시요라고 했다고 적혀있다. 기시 요네사쿠의 경우, 조선어 교육이 금지된 후에도 조선어 교육을 한 일본인 교육자로서 알려진 인물이다. 선동가 여러분, 박정희가 일본어 썼다고만 욕을 하지 말고 알고 써라. 좆비린내 극혐.
  13. 이 시기가 1961년 11월 11일인데, 당시 총리관저 만찬장에서 박정희는 연설을 모두 한국어로 했었고 일본에서는 한국어 통역관을 두지 않았다. 한일청구권협상과 한일외교협정의 개시자가 군내에서 독립운동가 출신자들의 대부였던 최덕신이었기 때문인데, 하여간 연설이 끝난 후, 박정희에게 일본인 출신이면서도 한민족으로서의 민족감정을 일깨웠다고 알려져 있는 히라야마 다다시와 기시요네사쿠, 나구모 신이치로 3인 중 2인이 끌려왔다. 나구모의 인터뷰를 보면 정계의 요구에 의해 왔다고 말을 했다. 더불어 박정희 역시 나구모가 와서 자신에게 깍듯이 90도로 인사한 것을 수치스러워 했다. 유교적으로 사제관계에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직위를 떠나 90도로 인사하는 것과 받는 것은 결례기 때문.
  14. 오노 반보쿠의 경우, 1920년대 민권운동가로 활동했던 사람이며, 민족차별에 대해 비판하던 인물이었고 일본이 패전한 후, 상당한 국가적 영향력을 쥐게 되었던 사람이었지만 이 시기에는 자민당 내 정치투쟁에 치여서 2선으로 밀려난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역도산을 비롯한 재일교포들이 상당히 선호했던 정치인이었고 권력 핵심부에서 밀려난 후에도 재일교포들의 인권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해준 인물로서, 박정희를 아들처럼 생각했고 일본 자민당 내 각 계파 정치인들의 약점이나 바라는 부분을 지적해 주었고 네마와시(비공식 접촉과 비선 접촉)을 통해 그들을 설득하라고 했고 자기가 주선을 해준 적도 있었다. 어찌 보면, 서로가 향하던 방향이 비슷한데다 정치적으로 상생하던 관계였다. 그리고 오노 반보쿠에게 자신을 낮췄다고 빼애액 거렸는데 오노 반보쿠도 자기를 낮췄다. 무식이 쉰내나는 텍스트 수준을 보면 아직도 부카니스탄식 반일감정에 쩔어사는 ↙↙↙↙↙↙↙↙↙쪽 파르티잔들의 찌질함에 치가 떨린다. 일본식 겸양체를 모르니 자기를 낮추는게 빼애액 거릴 수준. 고작 일본어 말하고 자기를 낮추는게 이득을 얻어내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분들은 좋은 일본문화 많이 받아들여서 자기 하드디스크의 AV 용량을 생각하시고 글을 쓰셔야 한다. ^오^
  15. http://www.ilbe.com/index.php?_filter=search&mid=ilbe&search_target=title&search_keyword=%ED%98%88%EC%84%9C&document_srl=5179196300
  16. 고등보통문관시험을 쳐서도 될 수 있었다.
  17. 이것을 윤보선이 제 5대 대통령 선거 때 박정희를 공격하는 네거티브 선전에 활용했다.
  18. 지금은 야당 대표가 된
  19. 주로 청장년층
  20. 사실 이 일에는 군내 비위자 청산 요구에 비위가 없던 장성과 장교들이 난리였었는데, 이들의 수뇌가 바로 박정희였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곽영주, 김형일 등이 박정희는 비위가 없는 것을 보면 빨갱이라고 했다. 이 발언이 육군 주요지휘관 회의에서 있었으니 군비리 수준이 얼마나 개막장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곽영주, 김형일과의 관계는 곽영주의 몰락 이후, 김형일이 민주당으로 가서 국회의원이 되면서 계속 악연이 이어진다. 김형일은 곽영주가 장면 정권기에 몰락하고 나서 숙군사업이 일어날 때, 육본회의실에서 박정희가 참모총장에게 투서한 일로 두고 '육군의 위상을 재정립하기 위해' 소집했다는 지휘관회의에서, 박정희에게 거품을 물고 손가락질하며 "당신이 부패무능한 지휘관이 누구냐는 것은 공개된 비밀이라 했는데, 군량미로 후생사업(?)하지 않는 지휘관이 누가 있단 말이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쥐꼬리만한 월급으로는 가족들을 부양할 수 없어서 군의 협조(?)를 받은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부패 운운한단 말이오?"라고 개소리를 했다. 이 개드립은 화제가 되어서 드라마 제3공화국에도 나왔다. 거기다가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후, 독자무기개발(무기 국산화)을 추진해 논란이 일어날 때도 빨갱이 드립을 친 전설적인 인물.
  21. 솔직히 최측근이라 쓴 새끼 자살해야한다. 전두환이 최측근이 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게 된게 땅굴사건 이후인데, 그 사건으로 청와대 출입에 제한은 있어도 제약은 없게 된 것이다. 그 이전에는 청와대 출입이 통제를 받은 기록이 있으니, 그냥 일반 측근이라고 봐야 한다. 어휴 박정희랑 이름만 같이 있으면 죄다 최측근이란 새끼들 최소 좆문가다. 글 읽는 새끼들도 알아서 걸러라.
  22. 구미 시장이 진짜로 박정희를 반인반신으로 추대하고 있다. 급한 사람은 1분 2초부터 볼 수 있다.
  23. 그나마도 요즘은 젊은이들을 필두로 이러한 경향이 많이 사라지고 있는 편이다.
  24. 장택상은 1952년 총리, 국회부의장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선거운동원 알바를 하던 서울대생 김영삼을 비서관으로 발탁했던 인물이다.
  25. 구미, 대구, 성주 이외의 지역에서는 잘못하면 돌에 맞는 수도 있다...물론 실제로 돌에 맞지는 않는다. 애초에 경상도는 젊은층,늙은층 할 것 없이 대부분 박정희를 존경하는 비율이 실제로 높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