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정권

이동: 둘러보기, 검색

무신정권(武臣政權)은 1170년 보현원에서 벌어진 무신란으로 생긴 정권으로 고려 중기를 빛낼 암군 의종과 고려 역사상 최악의 문신들 속에 이루어진 대표적인 흑역사의 반란이자 과도기의 반란군들이 세운 정권이다. 혹은 추천과 음서로 뽑힌 자들이 군인 아닌 군인들이었기 때문에 무신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경인의 난, 정중부와 이의방의 난이라고 한다. 고구려 간주리의 난과 연개소문의 난과 백제 해구의 난 신라 구십육각간의 난, 김헌창의 난, 고려왕조 이후 김훈 최질의 난 이후 생긴 그 선구자를 이은 후계의 난이자 혹은 조선왕조에선 이시애의 난과 이괄의 난과 임오군란의 선구자로 꼽히나 고려왕조와 조선왕조 통틀어 역사상 규모가 가장 큰 반란으로 노비까지 참여한 반란으로 규모가 굉장히 큰 반란이었다.

배경[편집]

고려 예종 무학재 도입 혹은 무과의 도입이 잠시 시행된바 있으나 문신들의 강한 반발로 마침내 고려 인종기 폐지되었고, 인종기 이자겸의 난을 시작으로 왕권의 내려가고, 정상적인 무신들을 키워내기보단 무신들을 세습과 추천을 통해 남발하여 뽑았고, 정작 이들의 계급은 상장군 그 이상은 가기 힘들었고 반면 군의 퉁제는 문신들이 독점하는 고려 군사 제도의 큰 모순이 생겨 벌어진 것으로, 고려 3대 충신으로 알려진 서희,강감찬,윤관 모두 문신들이었으나 윤관의 동북 9성 반환 이후 문신들은 전쟁을 접었고, 이후 문신들간 큰 갈등이 생기게 되고 이후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에 반란 진압도 문신들이 도맡아 했다.알다시피 고려사를 보게되면 반란의 진압은 김부식,임원후같은 문신들이 주로 맡았다. 하지만 김부식,임원후 이들은 후사 문제로 이내 갈라서게 되는데 임원후의 딸이 공예태후이며, 공예태후도 또한 제대로 뽑힌 왕비가 아니였고 해몽을 통해 뽑힐 정도로 도참과 미신에 따라 왕비가 왕이 되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후사 문제 처리가 될리가 없었다.. 결국 외척을 등에 엎은 문신들과 인종때 신임을 받은 문신들의 대분열로 의종은 이 혼란 속에서 왕에 오르고 무신들을 호위대로 부르나 정작 대접은 여전히 열악했고 제대로 된 잠을 자지도 못한채 밤낮을 왕의 호위를 해야했다. 더욱이 김부식의 아들내미는 정중부의 수염을 불태우게 되고, 의종이 수박 즉 무신들의 격투기 대회를 자주 열었는데, 한뢰라는 문신은 수박에 졌다고, 이소응에 뺨을 때리게 되는 병크를 저지르게 된다..결국 고려는 이러한 모순과 모순이 쌓이고 쌓이게 된다.

의종이 얼마나 막장이냐면 개경 전체에 사찰이든 무엇이든 지어 자신의 놀이터로 만들었고, 우스운 소리로 백성들이 머리깍아 팔아 생계를 연명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매우 막장이었다.

애초부터 군인들을 세습과 추천을 통해 남발하여 군과 정치의 지휘권은 문신들에게 다 갔고, 평민 계층이나 거주 이전이 안되어 착취만 당하는 향소부곡민 속 부곡민들 문제 그리고 사찰이 돈 빌려서 이자를 미친듯 올려 갚지 않으면 인신매매가 되는 일등등이 비일비재하고 조선 세종에 있던 그 종학 즉 왕족의 교육기구도 고려에선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고 매우 적었고, 알다시피 고려에선 왕자부라는 곳이 있으나 생각만큼 부실하고 유명무실했고 주로 자신이 광종처럼 독학하지 않는 이상, 절간에서 보고 배우거나 결국 이 분위기에서 여러 왕자들과 그리고 여러 왕족들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질리 없었기에 저런 왕이 나온 것이다. 의종이 아니였다고 해도 애초부터 내란으로 세워진 나라에선 개혁이 너무나도 시급한데도 제도가 너무나도 썩기에 왕이고 문신이고 무신이고 심지어 무신정권 이후 백성들까지도 죄다 타락하게 된 전형적인 중세의 암흑기였다.

경과[편집]

마침내 문신들의 분열과 이후 의종의 실정과 무신들의 세습화와 추천에 비해 낮은 대우가 충돌하며 결국 병인년 무신란이 터지고 마침내 세워졌다. 이의방,정중부의 난을 시작으로 임연의 난을 시작해 고려왕조에서 가장 반란이 많이 일어난 시절 중 하나이다.

결과[편집]

무신정권으로 인하여 말이 좋아 무신일뿐 공음과 음서와 추천을 남발해 대토지화와 세습과 잦은 과거제도를 열어 문신들의 변별력을 바닥으로 떨어트려 문신들을 어용화하고, 또한 기성 문신들도 의종 시절 반발로 무신정권에 붙었고 잦은 반란 속에 음서, 공음, 사병, 무과가 없는 불균형한 과거제 등등의 제도가 계속되고, 특히 최충헌이 가장 길었던 기간을 집권하고 이후 최씨무신정권이 세워지게 되고 마참내 강동성전투때는 9만명의 여요전쟁때보다 더 허접스러운 거란군이 들어오는 1~2만명의 군대만 보내고 그마저도 제대로 된 군대가 아니었고 몇십만의 군대를 다 풀지 않아서 결국 졸전을 거듭하며 마침내 몽골과 형제맹약을 맺게되고, 몽골 사신이 살해됨에도 조사조차 하지않아 이후 몽골군이 쳐들어오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고 이후 몽골과 전쟁에서도 군대를 풀지않아 김경손 장군을 바다에 빠트리고 박서 장군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등 많은 충신들을 죽이고 쫓아내고, 천민 출신 최고권력자 이의민, 김준도 백성들을 수탈하는데 공을 올리고 정국을 매우 혼란으로 만들었다. 더욱이 당시 무신들은 글도 못읽던 자들이 태반이었다.

이후 고려사에선 반역, 간신 등등의 열전이 실리게 되는데, 고려왕조 최악의 난신적자들이 모인 시절로 고려 역사상 최악의 간신배들이 줄을 이은 시절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에선 사병 혁파, 과전의 정착, 무과의 정착, 훈련관 설치, 한글의 창제, 왕권강화, 종학 도입, 최윤덕을 비롯한 전쟁영웅들의 신임 등등으로 무신정권의 가능성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평가[편집]

긍정적 평가[편집]

연산군에 버금갈만한 암군이었던 의종을 폐위시키고 죽이고, 썩은 문신들을 죽였다는 것에서 좋게 평가받고, 무엇보다 거듭된 반란 속에 노비들이 최고권력자가 되고, 최씨무신정권때와 대몽항쟁때 무신정권이 이규보와 같은 당대 문학자를 낳았고, 팔만대장경을 만들었고, 삼별초의 난으로 그 나름의 자주성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노비 출신이 왕의 2인자를 꽤찰 지경이었다. 그리고 병자호란 이후 터져야할 무신란과 흡사한 임오군란같은게 뒤늦게 터질때는 이미 주변 열강들에 둘러쌓인 상태였다. 우스갯 소리로 조선왕조에서도 병자호란 이후 이런 반란이 한방 터져서 우리 손에 조선왕조가 문을 닫아 우리가 대한민국을 세우면 어떻겠냐는 소리를 하겠으나 웃긴 소리이니 넘어가고, 이것도 부정적 평가에서 넘어가서 비난해보도록 하자.

사실 무신정변은 무신들의 잘못도 크나 더 큰 잘못은 고려왕조에 탁상돌림이나 해대던 문관들의 무능함으로 벌어진 일이다. 이미 고려는 앞전에 전쟁에 공을 세운 장수들의 영업전을 강탈하는 개병신짓거리와 심지어 승려가 무인의 권력을 능가하여 사원전을 빌미로 둔전을 강탈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이 사건의 원인 제공자는 문관들이었고, 진짜로 올것이 온것이다. 그리고 약 200년뒤 이와같은 일이 또 반복된다.

부정적 평가[편집]

거듭된 혼란과 문신이라면 그래도 문벌귀족 체제에 상황을 극복할줄 알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반란으로 죽거나 굶어죽은 병사들과 백성들은 몇천 몇만 몇십만까지 갔으며 공음, 음서, 사병, 좌주문생(시험관이 시험을 주관해 합격하면 그 시험관 밑에 문생이 되는 패거리 문신문화), 무신이라면서 무과를 도입하지 않으며 위에서부터 밑에 계급까지 거하게 해처먹었다. 뿐만 아니라 무신정권이라면서 여요전쟁보다 더 체제가 엉망인 거란군과 전쟁인 강동성전투때는 군대도 제대로 안풀다 여럿이 죽었고, 대몽항쟁때 잘싸우던 김경손 장군을 바다에 빠트리고, 역시 제 2의 강동성전투를 이어나가며 1차에서 부터 2차 3차 4차 5차 연달아갔던 정말 그야말로 졸전과 졸전을 거듭한 최악의 정권으로,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고 해도 황룡사 9층 목탑하나 제대로 못지키고 삼별초의 난도 무신정권의 연장판으로 실제로 이것을 진압한 것은 충렬공이라고 불린 김방경 장군이고, 이규보와 같은 당대 문학자는 최충헌한테 강직이다 뭐다 해서 아부하고 백성들이 추워서 집을 짓자 화를 버럭내며 매질하려고 하자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기 위해 그 집을 지을 나무들을 죄다 자기 따뜻하게 보내려고 땔깜으로 쓰는둥 사문난적의 으뜸이었다. 이것이 바로 토실을 허물어 버린 설에 나오는 내용이다. 정작 최씨무신정권을 붕괴시킨 사람은 류경으로 처음에는 최씨무신정권에 붙었으나 몇대에 걸쳐 해먹는 것이 한계가 생기자 김준과 합세하여 최씨무신정권을 종식시키고 최의를 척살하게 되나 이것 역시 김준이라는 함정을 만나게되며 정치적으로 큰 위기에 빠진다.. 태초에 무신들에 차별과 멸시로 일어섰다고 하지만 정작 추천과 세습을 통해 오른 자들이 반란일으켜서 만든거 또한 무신정권이고 툭까놓고 무신도 아니고 그냥 일개 시정잡배일뿐이라고 주장을 해서 경인의 난, 정중부와 이의방의 난이라고도 한다.

이러인해 고려말 조선초는 사병 혁파, 과전의 정착, 무과의 정착, 훈련관 설치, 한글의 창제, 왕권강화, 종학 도입, 최윤덕을 비롯한 전쟁영웅들의 신임 등등으로 무신정권의 가능성을 바닥으로 떨어트릴만큼 조선왕조에 숱한 영향을 끼친 최악의 시절이나 오히려 조선왕조는 이것을 하기 위해 여전히 고려의 문치주의를 계승하여 문신들의 권한을 드높이고, 무과는 한량 내지는 심지어 오랑캐로 매도했다. 사병은 혁파하나 이 분위기 속에서 이시애의 난이 터지고, 4군 6진때 전공자들을 세종, 문종의 치세를 이어 단종때까지 이어 우대하려고 했은데, 그들을 중심으로 황표정치로 백성들이 불안에 떨고, 계유정난이 터지며 더 이상 군공자들을 대접하는데 한계가 생기고, 이후 조선 성종때까지 치세가 한풀 꺽이나 그래도 무난하게 돌아가는 조선왕조가 이후 연산군의 집권으로 내리막길로 걷게된다. 뿐만 아니라 김준과 이의민의 실정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부곡민 체제가 폐지되나 노예제는 몇백년간 이어졌다. 정작 이의민이나 김준 본인도 행정 지식이 매우 개판이라 부곡민 체제를 깨트릴 역량이 전혀 없었다. 균전의 정책도 어려워지게 되고 재상 체제로 연산군과 다를게 없던 인조같은 왕을 쫓아낼 수 없게된다. 결과적으로 보면 조선왕조가 이 똥을 치우지는데 노력을 했으나 풀에 지쳐서 실패했다고 보면된다. 더욱이 공신 후손 우대로 음서를 가속화하고 장원 제도로 대토자화를 극대화하던 고려 성종을 고려의 으뜸의 성군으로 치켜세우며 음서는 여전히 정2~3품까지 유지가 되었고 과전과 직전 지주전호제등을 추진하나 소작농이 임금은 받으나 정작 얻을 땅이 별로 없어 제대로 된 토지 개혁도 못하게 되었다. 보통 거듭된 반란 속에서 나라의 개혁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개혁은 멈추고 폐단만 쌓이게 된다. 한마디로 왕부터 시작해서 문신이나 무신이나 밑에 평민이나 노비층까지 권력을 잡았지만 정작 고려의 왕을 비롯해 왕비나 문무신료와 백성들 모두를 위하기 보단 죄다 썩어있었거나 좀 나아도 문제 많았던 인간들 때문에 왕에서부터 노비까지 죄다 개혁과는 거리가 멀었던 시절이었다.

즉 이러한 무신정권으로 후기 조선왕조는 무신정권 체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알다시피 강동성전투를 시작으로 대몽항쟁때 입은 인적, 물적 피해와 자주성의 훼손 퇴보하는 개혁 등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조선왕조에서도 반란을 일으키는 세력들에게 이때보단 치밀하나 결국 별다른 대책이 없던 것도 이때의 영향이 큰것이다. 5.16과 12.12반란의 경우는 적어도 행정력이 뛰어나고 군공이 뛰어난 사람들 중심으로 정권을 잡았다는 점에선 무신정권과 임오군란보다 더 치밀했다는 것으로 이들은 무신정권의 군인들을 군인으로 취급하지 않고 띄우질 않는다. 대신에 병크인게 삼별초의 난을 항쟁으로 띄우게 된다. 원래 이는 해방기 엄청난 혼란으로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등을 등한시해서 찾지 않을 정도로 역사관이 확립되지 않을 시절에 항쟁이라고 붙인걸 시작해서 또 군사정권에선 삼별초항쟁으로 드높였으나 정작 그틀의 텃밭인 영남에 뭍혀있는 충렬공 김방경 장군이 들으면 놀랄 일이다. 웃긴건 전남 진도에 배중손 장군 사당이 있다. 정작 삼별초는 반란으로 제주나 호남에 큰 피해를 끼쳤는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