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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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우
출생 1965년 3월 15일(1965-03-15) (52세)
대한민국 제주도 북제주군 구좌읍 평대리
국적 대한민국
학력 고졸
직업 선원, 용접공, 일용직 노동자, 아마추어 화가
키 / 몸무게 cm / kg
웹사이트 김승우 씨 블로그

그림쟁이 아재.jpg

김승우(1965년 ~ )는 제주도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그림쟁이다. 일베저장소에서 그림쟁이로 활동하고 있다.

얼마 전, 일베에 자기가 만 49세 생일을 맞았다고 글을 올렸다.

본인 삶의 유일한 낙은 연필로 그림을 즐기는 것이라고 한다.

나이가 이제 50대인데도 배경음악을 넣을 줄 안다.

노땅체는 전혀 쓰지 않는다. 말투가 젊은 사람 같다.

자기 소개[편집]


47세 부끄러운 나의 인생 이야기  
 
나는 1965년 음력 2월 13일 제주도 구좌읍 평대리에서 30분 먼저 태어난
 
(세째형)쌍둥이 형을 따라 세상에 첫발을 내디뎠다.
 
나는 말그대로 일란성 쌍둥이다...
 
4형제중 제일 막내로 태어난 나는 가족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모친께서 제과점을 하는 나름데로 부유한 집에서 자랐다....
 
그러다 1971년 내가 성산포 동남 초등학교에 입학한후 3월18일 우리집엔 늦은 나이에
 
성산포 근방 군부대서 복무 중이던 부친의 사망 소식으로 갑작스런 우환이 닥치게 된다.
 
그당시 갓 초등학교를 입학한 코흘리게 였던 나는 부친의 사망으로 초상집이 된 우리 집과
 
친지분들이 통곡하는걸 보면서도 그닥 부친의사망을 실감 하지 못했었다....
 
 
휴가때 잠깐 집에 다녀가시는 부친이어선지 나는 지금도 부친의 얼굴모습을 기억하지 못하
 
고 그후 제사때 올려지는 영정사진만으로 영화배우같이 멎진 모습의 부친 얼굴만 기억 하고
 
있다......
 
 
 
부친이 사망한후 부터 우리집은 차츰 차츰 기울어져 갔다.
 
모친 혼자서 4형제를 키우며 제과점까지 하다보니 온갖 어려움이 많았다.
 
그기다 그당시 생활이 어려웠던 친지분들의 사촌형 둘 까지 떠맡아서 키우고 있었으니
 
모친의 그 고충은 말로 다 표현 못할겄이다...
 
 
그럭저럭 어렵게 살던 우리집은 차츰 늘어가는 빚으로 인해 모친은 내가 초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제과점을 처분하고 성산읍 고성리 동남동에 다 쓰러져가는 방 세칸 짜리 초라한 집으로
 
이사를 했다....
 
매일 들이 닥치는 빛쟁이에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면서도 모친은 그 연약한 몸으로 힘든
 
밭일을 다니셨다....
 
 
그런데 큰형과 둘째형이 고등학교를 다니고 나서부터 불량배들과 어울리더니 급기야 조직
 
폭력배가 되어  말썽을 피는 바람에 이틀이 멀다하고 찾아오는 형사들 때문에 모친은 도저히
 
살 수가 없었던지 내가 중학교 1학년 6월 즈음에 나와 세째형을 할아버지댁에 맞기고 부산으로
 
올라가 버렸다....
 
 
이때는 생활이 어려울적 모친의 도움을 받았던 친지들은 모두 성공해서 그럭 저럭 어려움없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그래서 모친은 셋째형과 나를 할아버지댁과 농사를 크게 지으시는 작은 아버지댁에 맞기고 매달
 
생활비를 부친다는 말을 남기며 부산으로 홀연히 떠나 버렸다....

 
친지분 집에 맞겨진 나와 세째형은 그후부터 작은아버지댁에서 친지분들의 온갖 험담을 들으며
 
머슴아닌 머슴살이를 하게 됐다....
 
 
나는 그당시 매우 내성적인 성격이어서인지  친지들에게 매일 들었던 "너의 엄마는 너희들
 
버리고 서방 만나서 부산으로 도망갔다"라는 험담을 들으면 혼자 화장실에가서 엉엉 울기가
 
일쑤였다....
 
그리고 매일 새벽 일어나서 농사나가시는 친지들을 위해 지게며 물통이며 온갖 농기구 들을
 
준비하며 농사일을 도와야 했고 심지어 빨래까지도 해야 했다....
 
일요일이면 새벽부터 지게에 20리터 들이 물통을 지고 감자밭이나 무우 배추밭에 가서 하루종일
 
농사에 쓰이는 거름을 지게에 지고 날라야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흙일(밭일)이라면 치가떨린다....
 
 
그런 이유로 지금도 일용직으로 다니며 일하고 있는 건축 공사현장에서도 땅파는 일만은 절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친지 집에서 살면서도 나는 밤이면 거의 매일 그림을 그렸다....

 
그림도구라 해바야 중학교 미술 선생님이 주신 수채화 물감과 뎃생 연필이 전부였지만 지금도
 
그림을 그릴때 만큼은 무었과도 바꿀 수 없는 내가 유일하게 누릴수 있는 행복이다....
 
친척집에서 살며 중학교 1학년이 막 끝날때 즈음 나는 도저히 친지분들에게 시달리기
 
싫어 예전의 집으로 와버렸다....

 
세째형은 그나마 공부를 잘했지만 나는 중학교 때부턴 아예 책을 보지 않았고 책가방엔
 
그당시 유행했던 팝송책들과 미술도구들만 가득 넣고 다녔다 그래서 학교 성적은 거의
 
꼴찌를 면치 못했다....

사실 나의 그림소질은 부친이 돌아가신 후 초등학교 1학년 4월 즈음에 한국일보사 주최 전국
 
아동미술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나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지만 어려운 생활을
 
하는 집에서 미술공부를 한다는건 꿈도 못꾸었었다...
 
이렇게 무작정 집을 나왔지만 돌아온 집은 이미 모친이 부산에 가실때 방두개 모두를
 
성산포에 있는 룸싸롱 접대부들의 숙소로 임대를 내준뒤였다...
 
그래도 두평 남짓한 창고로 쓰던방이 남아 있어서 나는 거기서 혼자 살기 시작했다....
 
새벽이면 신문을 들고 동네를 다니며 신문 배달을 했고 토요일이면 집에서 손수만든
 
냉커피통과 아이스크림 박스를 짊어지고 성산 일출봉 중간쯤에 올라가서 관광객들 상대로
 
냉음료 장사를 했다...
 
 
그런데 이것도 자릿세를 주지않는다는 동네 건달들의 행패로 두어달 하다가 도저히 참을수
 
없어 그 건달들에게 대들다가 두들겨 맞고나서 부터 그만 두었다...
 
그나마 오일장을 다니며 장사하시는 외할머니가 동네에 오일장 설때면 쌀을 갖다주셨다....
 
 
하지만 부엌은 전세내어 살고있는 술집 접대부들이 쓰고 있어서 나는 접대부들이 출근하기만
 
기다리다 모두 출근하고 나서야 몰래들어가서 그녀들이 먹고 남은 반찬과 밥을 몰래훔쳐먹었다.
 
세끼이상 굶어보면 무었이든 도둑질이라도 할수 있는게 인간의 본성이라는걸 이때 알았다.
 
그러다 들키면 성깔 더러븐 술집 접대부에게서 어김없이 날라오는 손찌검을 받아야 했다.
 
새벽녘이면 술에취해 고함을 지르며 들어오는 접대부들에 시달리고 낮에는 동네건달들이 찾아와
 
시비를 걸며 치고받고 싸우는 모습을 거의 매일 보게 됐다....
 
이때부터 나의 성격도 차츰 공격적으로 변하기 시작 하더니 중 3때부턴 아예 학교도 다니지
 
않았다....

이때뷰터 술담배를 시작했고 어쩌다 학교 가는날이면 학교 유리창이나 기물들을 부수고 다녔다.
 
아마 중학교 다니면서 무기정학 유기정학등의 징계를 나만큼 받은 사람은 거의 없을겄이다.
 
그래도 내가 사고를 칠때마다 중학교 미술 선생님 이셨던 박유승 선생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퇴학은 면했다...

 
그분은 나의 그림소질을 보고 자청해서 개인교습을 했지만 이미 삐딱하게 변한 나의 성격은
 
그걸 받기엔 늦어버렸다.....
 
박유승 선생님은 내가 학교에 가지않는 날은 어김없이 집으로 찾아와 어지럽게 널려있는 나의
 
방바닥에 가끔 돈봉투나 유화물감 같은걸 놓고 가셨다.
 
그나마 나를 위해주시는 박유승 선생님의 권유로 짧은 시간 이지만 그림을 배워 각종 미술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아왔다....
 
내가 학창시절 받아본 상은 죄다 미술대회 상뿐이다...
 
 
학교에서 소풍을 갈때면 박유승 선생님과 함께 미술도구를 들고 성산포 신양리 섭지코지로 가서
 
일출봉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그린 그림들은 중학교 복도에 전시됐고 지금도 대 여섯 점이 전시되어 있는걸로 안다....
 
 
그렇치만 모든 끼니를 나 혼자서 벌면서 살아야 하는 학창시절 이기에 등따습고 배부른 그림을
 
그린다는건 그저 사치에 불과했다.

 
거의 매일을 친구집을 전전하며 눈치밥을 얻어먹으러 다녔고 학교에 가지 않는날은 그당시
 
제주도에서 거의 모든 밭에서 재배하는 유채나 감자 고구마 등의 밭에가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심지언 약재로 쓰이는 지네 까지 잡으러 다녔다...
 
그렇게 살다가 중학교 졸업할 즈음에사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부산에 올라가셨던 모친이 집으로
 
내려오셨다...
 
하지만 이때 이미 나는 내가 살던 우리집 바로 뒤에 있는 성산수산 고등학교 기관과에 원서를
 
내 버린뒤였다.(지금은 성산 고등학교로 바뀌었다)
 
입학 원서에 찍는 보호자 와 나의 도장은 내가 직접 도장 나무에 새겨서 원서에 찍어버렸다....
 
나는 그당시 도장 새기는겄도 수준급 이어서 중2 때는 3학년 선배들이 고등학교 진학원서용
 
도장을 도장집의 절반값만 받고 300 여명이나 되는 선배들의 도장을 모두내가 새겨서 수입이
 
짧짤했는데 동내 도장집 주인의 고소로 중학교 교장과함께 경찰서까지 가게 된 웃지못할
 
일까지도 있었다....
 
도장을 잘새긴다는 입소문이 퍼진뒤로 선배들은 각자의 부모님께 도장 새긴다며 그당시 도장집
 
가격인 천원을 받고 나에겐 5백원을 주고 자신은 5백원을 챙기게 된겄이다.
 
도장나무는 도장집 쓰레기통에 버려진 쓰다만 도장나무를 줏어와서 연필칼로 한개당 오분여의
 
시간으로 후다닥 새겼다....
 
그러다보니 원서접수 철때면 300여명의 학생들이 도장집 고객이 되는데 이때는 내가 거의 독점을
 
해버려서 도장 새기러 오는학생들이 없길래 도장집 주인은 지나가는 학생을 붙잡고 물어봤더니
 
2학년 후배가 도장을 잘 새겨서 선배들이 모두 그 후배에게 맞긴다는 말을 듣고 도장집 주인은
 
경찰서에 고발을 해버린거였다....

 
 
고등학교 진학할 무렵에사 모친을 다시 만났지만 이미 삐뚤어져버린 나는 나는 아무 말도
 
안하고 집을 나와 버렸다...
 
그렇게 동네 건달 형님들 집을 오가며 살다가 고등학교 입학식날에사 모친 몰래 학교에 갔는데
 
한참 입학식을 하는 와중에 경찰차가 들이닥치더니 입학식장에 들어온 형사들이 나의 이름과
 
친구들 이름을 부르며 나오란다....
 
그 후 경찰서로 잡혀간 나와 친구들은 형사들에게 오지게 얻어터지고 피해자와 합의를 안보면
 
이당시 산천 초목도 울고간다는 삼청교육대 보낸다며 윽박질렀다....
 
 
 
집을 나와 건달들하고 돌아댕기다 패싸움에 휘말렸는데 상대편 건달몇이 많이 얻어터졌는지
 
병원에 누어 있단다...
 
그 부모의 신고로 입학식날 모두 경찰서에 잡혀들어왔다...

 
나는 산천초목도 울고 간다는 삼청교육대가 무서워 할 수 없이 모친에게 전화 했다....
 
이미 조직폭력배 생활을 하는 둘째형과 큰형은 삼청교육대를 경험한 뒤라 얼마나 무서운
 
곳인가를 형들의 이야기로 알고 있었던 터였다...
 
둘째형은 그때의 상처로 지금도 허리를 잘쓰지 못한다고 한다...
 

 
다행히 모친의 합의로 경찰서에서 풀려났지만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사고만  치고 다녔던 나는
 
고등학교도 다니는둥 마는둥했다...
 
모친은 나를 포기하고 다시 부산으로 올라가셨고 나는 성산포에서 아르바이트로 밤마다
 
조업나가는 멸치잡이 어선을 타러다녔다....
 
 
해뜰녘에 조업을 마치고 부두에 들어오면 밤새 멸치 그물을 당겨야 하는 중노동에 힘든
 
조업으로 파김치가 된 몸을 간신히 버티며 녹초가 되버린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학교에가서
 
그대로 책상에 업드려 잠에 떨어진다....

 
선생님들은 나의 처지를 이미 알고 있어서 깨우지 않는다....
 
여름때면 보름마다 찾아오는 물때좋은 6일간은 낚시대와 오리발 고기잡는 작살을 들고 아예
 
학교도 안가고 성산포 바다에서 고기를 잡으며 하루종일 살았다...

 
이때 잡아들인 물좋은 생선은 그날 생선장사 아줌마에게 팔기도 하고 집에 사는 접대부
 
누나들에게 반찬하라며 주기도 했다...

 
나는 이때 고딩때부턴 차츰 그 접대부 누나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누나들 모델삼아 인물화도 그려주고 어떨땐 누드화 까지 그렸었다...
 
누나들도 나의 이런 재주를 보고 용돈도 챙겨주고 방청소도 해주고 빨래도 해줬다...
 
이렇게 고등학교를 다니다 3학년 2학기 시작때부터 본격적인 사회생활이 시작됐다.
 
2학기 때부터 기관사 실습 이 시작되서 나는 모친 몰래 인천으로 올라갔다...
 
인천가면 고생을 많이 한다는 선배들 말도 들었지만 중학교 때부터 눈칫밥으로 살아와서
 
그런고생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많은 돈을 벌 수있다해서 무작정 올라갔다....

 
이후로 이어진 15년간의 선박생활은 마도로스스토리라는  글로 블로그에 카테고리로 분류해서
 
연재 되고 있으니 생략 하고
 
1996년 참치잡이 원양어선 근무중 불의의 사고를 당해 오른 손목이 뼈채 절상되되어  치료를
 
하느라 근 1년반여 아무것도 못하고 치료와 재활에 전념하다

 
일전에 부산에서 선박 생활하며 중간 중간 디제이를 했었던 음악다방에서 알게된 후배의
 
소개로 예인선을 타게 됐는데 7개월동안 고생만 죽어라하고 급기야 선주부도로 두달치 월급도
 
못받고 그배를 내린후 여수 사는 친구가 소개해준 중형 기선저인망의 기관장 생활을 4개월했는
 
데 이배또한 사람 할짓이 못되는 험한 고생만 하는배여서 제주도 한림항에서 그만두고 다시는
 
배안탄다는 다짐을 하고 집으로 왔는데 와서보니 그전 손 다쳤을때 근무했던 원양선사에서
 
수차례 전화가 왔었다는 말을 듣고 연락을 해보니 손다친 보상금이 나왔다며 수령해 가란다.
 
 
 
4,800 만원의 보상금을 받고 멀할까 생각하다 큰형님께서 건축업을 해보라고 해서 조립식
 
건축 사업을 시작했다....

사실 큰형님도 건축업을 하다가 내가 배타면서 꼬박꼬박 모친께 보내는 월급을 모친한테
 
뜯어내서 모두 써버렸다...
 
더욱이 모친이 힘들게 모아논 돈으로 구입한 성산포의 알짜베기 땅까지 큰형님의 사업부도로
 
모두 날려버렸다....
 
그후 큰형님은 알콜중독자가 되었고 지금은 간경화에 당뇨에 버거쓴씨병까지 생겨 거동을 전혀
 
못하는 1종 생활보호 대상자가 되었다....

형수는 그뒤로 이혼했고 둘째형은 어디로 갔는지 아직도 소식이 없다....
 
아마 조직폭력배하면서 일본 야쿠자를 많이 알고 있어서 야쿠쟈 따라 일본에 갔을상 싶다...
 
마땅히 할게 없어 큰형님의 건축에 대한 경험과 노하우를 믿고 나도 건축업을 시작했다....
 
 
건축업을 하기위해 그당시 처음으로 한국에 도입된 스틸하우스 시공법을 배우기위해 4주간 삼성
 
스틸하우스란 회사에서 시공 기술 연수도 받았다....
 
손재주와 눈썰미가 있어서 인지 남보다 빠른 기술을 터득했고 도급받은 시공도 우수한 평을 받으
 
며 입소문으로 일감이 많이 들어왔는데 이러다 보니 욕심이 생기게 되어 큰형이 소개해준 사람
 
의 대형공사를 하청 받았는데 이 원청 회사는 첨에는 현찰로 결재를 하더니 중도금부터는 3개월
 
짜리 어음으로 지급했다....
 
나는 그래도 형이 소개한 사람이라 믿고서 그 어음을 배서하고 자재대금으로 대구 삼환금속
 
샌드위치 판넬공장으로 보냈고 몇일후 큰형이 소개해준 사람이 나의 사무실로 찾아오더니
 
어음을 돌려주라해서 1억 3천삼원의 어음을 받고 배서하여 친구에게 부탁해서 깡을 해주고
 
그사람에게 주고난 10여일후 대구 삼환 금속에서 어음이 부도 났단다....
 
중도금으로 받은 9천만원과 깡을 한 어음 1억 3천을 떠안게 됐는데 내게 어음을 준 사람은 다른
 
어음까지 11억이란 거금을 나를 비롯한 다른사람들에게 그렇게 사기치고 나서 필리핀으로
 
도주해버렸다...

나는 그길로 사업을 실패하고 신용불량자라는 낙오자가 되어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않게
 
되었다...
 
거기다 모친 명의로 사놓은 23평 의 아파트는 빚을 갚기위해 모친 보증으로 저당까지 잡혔다.
 
큰형님은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매일 술만 퍼마시고 있었고...
 
세째형은 원양어선 기관장을 하면서 외국에 있기에 연락도 안되고 친지분들은 누구하나
 
도움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우선 급한 불부터 끈뒤 2천여만원의 카드 빚과 9,000 여 만원의 은행빛도  갚지도 못한채
 
현금 16만원 을 갖고 인천행 여객선을 타고 2000 년 6 월 29 일 인천을 경유하여 서울로
 
상경했다....
 
그런데 서울생활 참으로 막막했다...

처음 보름간은 고시원 쪽방 생활을 하며 새벽 인력시장을 다녔지만 오른손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걸 알게된 사용자는 다음부턴 나를 쓰지 않았다....

그래서 요구하는 일을 제데로 못하다 보니 일을 할려해도 장애를 가진 손이라 사용자들의
 
기피로 일을 할수 없게됐고 이러다 보니 어느새 빈털터리가  되어 오갈데 없이 영등포 역에서
 
노숙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주위 노숙자들과 함께 복지단체에서 점심때주는 무료급식으로 하루를 버티고 어쩌다 돈이 생긴
 
타 노숙자가 주는 소주 한잔으로 그나마 차가운 새벽기운을 버티고 살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매일 4개월여를 새벽 인력시장으로 갔는데 어느날 일을 나가기위해 새벽시장으로 모인 사람들앞
 
에 오래된 봉고차 한대가 서더니 용접공을 찾았다...

나는 얼른 접니다 하고 고함을 친뒤 그차 가까이갔다.
 
그차에서 에이취빔 용접하냐고 묻길래 많이 해봤다고했더니 차에 타란다...
 
그러고 일하는 능력을 보고 그날 일당을 준단다...
 
 
나야 단돈 만원이 아쉬운 때인데 오만원을 주든 기능공 일당을 주든 개의치 않았다.
 
그래도 용접은 왼손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을만큼의 실력이라 걱정이 덜됐다...

이렇게 그분과 함께 20일간 일을 하며 그분은 나의 처지를 알게 되었고 작은 조립식 건설업체
 
사장인 이분은 나를 보고 부산으로 내려가서 같이 일을 하자며 나를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이때부터 나는 이분이 도급받은 부산의 녹산공단과 김해 내삼공단 주촌공단등 경남 지역 공단의
 
공장 신축 공사를 하기위해 3년여를 현장마다 컨테이너를 옮겨다니며 컨테이너에서 추위와 더위
 
를 참으며 사시사철 살게되었다...
 
 이후 약간의 돈을 벌게되서 은행빛과 아파트 근저당을 풀게 됐는데 그후 이 사장님은 자신이
 
고향인 전북익산에 건설회사를 차린다며 나보고 같이 가자는제의를 거절하고 그냥 부산에서
 
일한다고 했다....

이미 이때는 원청회사의 현장소장 들도 많이 알게 됐고 조립식 업계에서 잘한다는 소문도
 
퍼져 있던 때라 나혼자서도 충분히 해나갈 겄같아 부산에서 일한다고 했다...
 
이 사장님은 부산의 타 거축 회사 사장인 자신의 친구를 소개해주고 익산으로 갔고 나는 그
 
친구분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시공팀장으로 일을 하게 됐지만 5개월 후에 그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직장을 잃고 다른 직장을 구하려 이곳 저곳 알아보는중에 다행히 이 소식을 들은 밀양
 
사는 친구가 자신의 삼촌이 건축 리모델링 회사에서 스틸하우스시공 경력자를 채용한다고 해서
 
밀양으로 올라가게 됐다....
 
 
 
나는 이회사에서 틈틈히 실내 인테리어 를 배웠는데 2년만에 인테리어 시공팀장으로 진급하게
 
되어 일을 하다 2007년 1월에 고향인 제주에 내려와서 그동안 모아논 돈으로 집을 짓기위해
 
제주시 조천리 해안에 있는 89평의 대지를 구입하고 직접 손수 집을 짓기위해 필요한돈중
 
절반정도 모자란돈을 더 벌려고 밀양으로 갈려는데 모친께서 이제는 멀리 나가지 말라며
 
나를 붙잡기에 할 수없이 아파트를 처분하고 그돈으로 집을 지을려고 등기부등본을 떼어보니
 
내가 없는새 세째형이 이미 모친을 윽박질러서 빛으로 근저당 되어 있었다....
 
이제는 더 놀랄일도 없었다....
 
 
어차피 내가 이렇게 살아야될 팔자인가 체념해 버렸고 다시 제주에 있는 건축 회사 로 입사해서
 
1년만 고생하여 돈을 모으면 나름 집을 지을수 있다싶었다...

 
 
그러다 2007년 10월 9일 갑자기 모친께서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수술비 마련으로 할수 없이 집을
 
짓기위해 구입해 놨던 땅으로 대출을 받을려고 등기부등본을 떼어보니 이것마저도 세째형이
 
사채업자에게 저당잡혀 있었다....
 
나는 지금도 남아있는 카드빚으로 아직도 신용불량자여서 땅은 내가 구입 했지만 명의는 그래도
 
가장 신뢰할 수 있었던 세째형 이름으로 해뒀는데 이 땅 마저 사채업자에게 근저당 되어 있었고
 
이사실을 알게된 모친이 그 충격으로 뇌경색에 이르게 되어 이미 사경을 해맸던 모친은 다행히
 
의식은 돌아왔지만 반신마비에 입까지 마비되어 말을 못하고 나를 알아보긴해도 세상 살이가
 
하도 한스러운지 말을 못하고
 
어머님 께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린다.
 
 
 
 
세째형은 배를 타다 계약 만료하고 이미 2년전에 귀국했지만 가족에겐 알리지 않고 부산에다
 
자신이 번돈으로 2층 짜리 주택 두채를 사서 전세를 내주고 작은 모 선박회사 공무감독으로
 
근무중에 2006년 12월에사 제주에 내려와 모친과 큰형을 보고 하는 말마다 무슨 펀드니 어쩌니
 
하며 돈을 많이 벌었다 길래 그 말을 믿은 모친은 내가 땅을 사고 집을 지을려니 명의는 세째형
 
앞으로 하자고 했다....
 
 

나도 모친말을 듣고 그렇게 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자신이 산집 모두 빚으로
 
저당잡혀있고 내가 모르는 사이 온갖 감언이설로 모친을 꼬드겨 모친이 꼬깃꼬깃
 
모아둔 2천만원에 모친이 그나마 보훈청에서 받는 전사자 미망인 연금 보증으로
 
4천만원까지 대출해가는 바람에 연금 절반인 43만원만 지급되고 있었다...

급기야 2009년 3월에 내가 구입한 땅이 법원 경매 낙찰되었고 이모든 일을 저지른 세째형을
 
백방으로 수소문 했지만 찾지 몾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모든 빚들은 세째형이 성인 오락실의 바다이야기로 재산까지 모두 날리고
 
급기야 모친과 나를 속이고 인륜마저 저버린 파렴치한 핏줄이 되어 버렸다....
 
사실 나는 고 3때부터 대학에 갈려고 죽어라고 공부만했다.

그런데 세째형은 그당시 고등학교에서 거의 1,2등을 독차지했고 대학교도 수석입학했던
 
우등생이었다.

그래서 모친은 나 보다 공부를더 잘했던 세째형에게 정이 많이 갔었고 어려운 형편에 나마저 대
 
학 간다는건 도저히 불가능해서 나는 포기하고 대학 가는걸 형에게 양보하고 2학기 때부터 모친
 
몰래 인천으로 배타러 가게 된겄이다....
 
 
 
모친은 세째형 대학 뒷바라지로 부산 초량동에서 여관을 돌며 청소부로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았는데 이렇게 부모가슴에 비수를 꼿아버리고 행방이 묘연해진 세째형이 생김새가 나하고
 
똑같은 쌍둥이란게 더 없이 참기 힘들기에 나의 마지막 희망마저 았아가 버린 세째형을 원망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가장 믿었던 세째형이 저지른 일련의 일로 충격에 쓰러진 모친을 살리기 위해 병원과 재활원을
 
오가며 치료에 매달리기 위해 나는 거처 마져도 병원 인근의 모 여관에서 지냈다.
 

이후 나는 안정된 직장을 다닐려해도 다닐 수가 없었다.
 
감당 하지 못할 정도로 들어가는 치료비는 고사 하고라도 뇌경색 수술 후유증에 한달에 서너번
 
새벽녘이나 대낮에 발작을 일으키는 모친을 뒷바라지 하다보면 근무를 빠지는 날이 자주 생기고
 
또한 다니는 직장에서 월급이 한달 만이라도 밀리면 다음달 간병비나 치료비 마련에 어려움이
 
생긴다.
 
그래서 할수 없이 잡역부로 적은 돈일지언정 그날그날 수령 가능한 일용직 용역 사무실에서
 
새벽에 나가 건설 현장의 잡역부로 일을 다녔다.
 
이미 세번의 뇌수술로 그동안 집을 짓기위해 벌어뒀던돈 2천여만원을 수술비로 모두 지출했지만
 
언제 까지 입원치료에 하염없이 매달려야 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일부의 병원비는 세째형이 모친의 연금을 보증으로 대출한 절반으로 깍인 보훈 연금
 
43만원으로 충당하지만 그밖에 들어가는 주간 간병비, 검사비와 보조기구 구입비가 매달
 
백여만원 지출되니 일용직
 
건설현장 다니며 당일 받는 돈을 갖고 있어야만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이렇게 근근히 버티며 지내오다 2008년 11월경 모친 병세가 차츰 낳아지길래 비용이 훨씬
 
적게 드는 요양원에 모친을 보내놓고 안정된 직장을 구하려 이곳저곳 수소문 했지만 마땅한
 
일을 할수 없었다.
 
 
 
더구나 나의 손은 이미 모친의 병원비 마련을 위해 줄곳 힘든 건설현장에서 일을 해서인지
 
일마치고 돌아오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통증과 함께 고질적 근육경직이 찾아왔다.
 
근육 신경 장애라 추워지는 겨울 날씨엔 차가운 바람만 스쳐도 손의 통증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파오기 시작했다.
 
참기위해 거의 매일 진통제를 달고 다녀야 했지만 차가운 겨울날은 진통제도 별 소용이 없었다.
 
요양원에 모친을 보낸후 비용 마련에 매달리지 않아도 됐고 추운 겨울이라 근육 신경 마비가
 
생겨 일을 지속적으로 할수도 없었고 차츰 그림에 대한 욕구가 생겨 연필을 제데로 쥘수는
 
없지만 화장지라도 말아서 그려보면 어떨까 생각하고 아직 그림 그리는 감각이 남아 있을겄같아
 
다시한번 그림에 도전했다.
 
 
아직은 작품을 낼만한 수준이 아니지만 지금 추세로 꾸준히 하면 언젠간 대한 민국 미술대전에
 
도전할 날이 오리라  내심 믿고 있다.....
 
아직은 그림으로 말할수 있는 좋은 그림을 그리진 못하지만 더구나
 
대학을 안나온 비주류인 내가 미술계에서 얼마나 받아 줄런지 모르지만 살아 있는한 끝까지
 
도전할 겄이다.
 
 
 
그동안 내가 살아오며 망나니로 자랐던 내가
 
 
지금의 고생은 그때의 업보라 생각하며
 
 
나는 이렇게 말하고싶다.
 
 
 
진정한 예술이란?
 
평생 습작만 만들던 예술가는 이름 없이 사라지겠지만.....
 
후에 남은 그 습작의 흔적이 가장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감동과 경이로움으로 기억될 때
 
최고의 작품이 남긴 진정한 예술 이란것을
 
믿어 의심치않는다.

평가[편집]

긍정적[편집]

어릴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신데다가 손목까지 잘린 경험이 있고 노가다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 일베저장소에서 동정을 많이 얻었다. 거기에다가 정치 성향도 보수고 나이 50인데도 배경음악 넣을 줄 알고 노땅체는 안 쓰는 깨어있는 아재다. 결정적으로 미대 출신도 아닌데 연필로 그림을 노무노무 잘 그린다!!

부정적[편집]

그래봤자 나이 50먹고 일베 16렙 찍은 거 보면 레알 엠창인생인듯.


블로그[편집]